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 ‘간우회’를 조직한 박자혜
1919년 3월 1일.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기 위한 독립운동인 ‘3.1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조선인, 일본군 할 것 없이 수많은 부상자가 생겨났고, 총독부 의원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들은 한국인의 생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일본군만 치료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간호사는 분노로 떨리는 두 주먹을 꼭 쥐고 결심합니다.
‘아, 이제껏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당하는 거야. 이제 저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 줘야겠어.’
- 7~8P, 본문 중에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른 간호사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읍니다. 나아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일제에 맞서 파업과 태업을 조직적으로 주동합니다. 그가 바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독립운동가, 박자혜입니다.
궁녀에서 간호사로,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박자혜는 어린 시절 궁녀의 삶을 살았습니다. 네다섯살 나이에 아기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간 그는 1910년 12월 30일,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박자혜의 총명함을 알아본 조 상궁은 공부를 권했고, 박자혜는 기쁜 마음으로 숙명 여학교에 진학한 후 총독부 의료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간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자혜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살뜰히 돌보는 간호사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용기 앞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또 한번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말입니다.
신채호의 아내가 아닌 독립운동가 박자혜
박자혜는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아닙니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라도 독립운동가보다는 신채호의 아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간호사 박자혜』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독립운동가로서 치열하게 살아간 박자혜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태업과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험한 고문을 당해야 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견뎌야 했습니다. 만주로 본거지를 옮긴 뒤 단원 신채호와 결혼하게 된 박자혜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출산을 돕는 조산사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독립투사들의 안내와 연락을 전하는 임무를 멈추지 않았고,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홀로 길러 내야 했지요.
박자혜는 일본이 주는 봉급을 받으며 간호사로 살아가는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여성이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결국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길을 걸을 것을 결심합니다.
그의 숭고한 결심 뒤에는 ‘내 나라를 잃을 수 없다’는 애국심과 ‘민족을 지켜 내겠다’는 꺾이지 않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삶을 바친 독립운동가, 민족의 운명과 맞서 싸운 주체적인 인간이었던 박자혜. 치열했던 그의 삶과 투쟁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