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그려내는 생명과 성장, 일상의 풍경들
『식물스케일』은 작가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식물 이야기를 보여준다. 첫째는, 가족과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은 식물들이다. ‘애지중지하다가’ 글과 ‘한 척의 범선, 한 척의 정원’ 글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조성한 발코니 정원에서 보낸 시간과, IMF로 인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그곳에서의 추억을 소환한다. 이 글들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가족 관계의 변화와 성장을 식물의 생장과 연결시킨다. 둘째는, 창작과 식물의 관계다. ‘병기이자 동료이자 죽음이자’ 글에서 작가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 꽃들이 어떻게 창작의 동반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작가에게 꽃은 “낭만의 반대편”에서 필요한 존재로, 시를 쓰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하며 그 자체로서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존재다. 작가는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통해 시의 탄생과 마감을 함께 경험하는 특별한 관계를 그려낸다. 셋째는, 건축적 시선으로 본 식물과 공간의 관계다. ‘식물의 집’ 글에서 작가는 화분이 단순한 그릇이 아닌 “잘 설계된 집처럼 거주하는 식물의 특성에 맞게 사방의 고유한 입면을 갖고 구조적으로, 기능적으로, 미학적으로 나름의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건축물임을 발견한다. 건축가가 디자인한 특별한 화분과의 만남을 통해 식물이 어떻게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지, 삶의 터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넷째는, 관계와 일상의 확장으로서의 식물이다. ‘설화가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는 방식’ 글에서 작가는 반려견 설화와의 산책을 통해 알게 된 식물들의 이름과 특성이 어떻게 일상의 풍경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또한 ‘보이는 것을 보는 눈’ 글에서는,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해 고민하며 성찰한다.
건축과 문학이 만들어낸 특별한 글쓰기
작가의 글쓰기가 특별한 이유는 건축과 문학이라는 두 영역의 언어와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작가는 건축 용어와 개념(‘스케일’ ‘입면’ ‘구조’ ‘공간’)을 자연스럽게 일상의 관찰과 사유에 적용하며, 이를 통해 식물과 인간, 공간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예를 들어 ‘10리터의 세계’에서는 작은 수조 속 수중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생태계를 마치 건축 도면을 분석하듯 세밀하게 관찰한다. “겨우 10리터의 물로 이루어진 세계는 내가 사는 대기권만큼이나 낯설고 익숙한 것들로 우글거리며 하나의 생태계와 풍경을 이룬다”라는 문장은 작은 공간 속에 담긴 우주적 풍경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축적 시선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원형정원’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작가는 미술관의 원형정원을 둘러보며 정원가 황지해와 나눈 대화를 통해 공공 공간에서의 식물의 역할, 예술과 자연의 만남, 그리고 그곳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다층적 사유를 펼친다. 두 사람은 단순히 공간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연을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한다.
식물과 함께하는 무해하고 아름다운 삶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한 일상의 작은 변화와 순간들이다. “빛과 바람과 물은 식물의 기본적인 생육조건이기만 할 리 없다. 식물이 빛과 바람과 물을 거느릴 때 완성하는 아름다움은 우리의 둔탁해진 오감을 한 꺼풀 벗겨낸다.” 작가는 식물을 통해 우리의 감각이 일깨워지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시선의 산책’ 에서는 베를린 여행 중 창문 너머로 바라본 중정의 풍경을 통해 내면의 갈등과 성찰의 순간을 그린다.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식물과 건축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핍진한 문장들은 우리를 작가의 곁으로 데려가 옆에 세운다. 특히 ‘자세히 보기’와 ‘보이는 것을 보는 눈’에서는 관찰의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돋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에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대충 보았을 때보다 자세히 보았을 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혹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고통과 슬픔의 웅크린 등을 발견할 확률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동백꽃을 자세히 관찰하는 과정에서 그 입장이 변화하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식물스케일』은 단순한 식물 가꾸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식물이라는 존재를 통해 한 도시 생활인의 일상, 창작의 과정, 관계의 형성과 상실, 공간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사색의 기록이다. “식물스케일이라는 설정 아래 포섭되는 나의 세계는 무해하고 아름답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세계를 새로운 척도로 바라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맑은 위안과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