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훼손된 조선불교를 치유하면서도
지역공동체를 위한 복지와 교육에 매진한 선지식!!
원력보살이었던 만암 스님의 평전 출간
일제의 간악한 왜색화, 온몸으로 막아내다
일제는 조선불교의 근본 뿌리조차 없애기 위해 ‘취처육식(娶妻肉食)’을 강요하며 왜색화를 꾀했다. 그로 인한 조선불교의 전통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과 비구 대처간 분규, 만암종헌 스님의 일생은 조선 말,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사에 이르는 역사의 격변기 속에 있었다. 만암 스님은 출가 수행자의 위의와 종단의 법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그 시기의 고뇌들이 가득하다. 수행가풍을 벼리고 도제양성과 교육, 포교, 복지 등 버거운 문제들을 헤쳐나가야 했기에 스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 가운데 만암 스님은 오직 부처님 법에 의지해 정진하고 포교하고, 민초들을 위해 복지와 교육 사업에 매진하였다. 불교와 세간에 절박한 불사들을 쉼 없이 실행하고 널리 홍포했다. 스님의 행보 하나하나에는 “인재 불사가 곧 항일”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1909년경 승려들의 현대적인 교육기관인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세웠다. 인재 불사만이 식민지를 벗어나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흔들림 없었다.
수행과 교육의 당간지주를 세우다
《만암 평전》에는 ‘오직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겠다’며 정진한 선대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정진과 화합의 수행공동체를 지켜내겠다는 만암 스님의 원력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만암 스님은 솔선수범했다. 특히 사회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생하면서 항상 사회적 약자를 부처님 모시듯 실천했다. 어지러운 악조건 속에서도 교육 불사에 매진하셨기에 스님의 곁에는 십대 안팎의 어린 사미들이 줄을 이어 산문을 열고 입산하였다.
“세상의 인연이 이미 박(薄)하고 입산한 지도 오래지 않았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게 되매 이는 바로 불문에 중이 되는 길밖에 없으니 문득 이 일을 당하여 인간 세상에 참혹한 일을 어찌 다 이르겠는가.”
이 한 구절은 만암 스님의 일생이며 구도의 길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하는 계율이자 화두였다. 스님은 속명이 있을 터인데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속가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어떻게든 속세의 인연을 끊고 오직 수행자로서 한 길을 가겠노라고 다짐한 처절한 결기였다. 스님은 ‘수행자가 가는 길’에서 결코 벗어남이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만암은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이었다. 남녘의 백양사에는 전쟁의 화가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전라도 일대의 사찰들은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야 한다며 거의가 남쪽 군경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백양사에 군인들이 들어와 암자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군인들이 대웅전으로 몰려갔다. 그 안에 만암 스님이 앉아 있었다. 군인들이 만암 스님을 끌어내려 했다. “대웅전만은 안 되오. 부처님만은 지켜주시오.” 그렇게 대웅전을 지켰다.
한국불교의 기준이 되는 교육의 주춧돌을 굳건히 하다
만암 스님은 1916년 백양사 주지로 취임했다. 우선 아름다운 도량을 짓고 싶었다. 당시 백양사는 극락보전과 초가 한 채만 남아 있었다. 스님은 자신의 호처럼 ‘만암(曼庵-아름다운 절)’을 짓기 시작해 불사를 원만히 마무리했다.
만암 스님은 1951년 6월 조선불교 제3대 교정(敎正)에 추대되었다. 제1대 석전 스님, 제2대 한암 스님의 뒤를 이었다. 두 스님에 이어 교정으로 추대됐음은 당시 만암의 불교계 위상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석전 박한영은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장직을 만암보다 늦게 지냈지만 만암과 더불어 인재양성에 매진했던 교육의 선구자였다. 백양사에서 광성의숙을 세웠을 때는 박한영이 초대 숙장(교장)을, 만암이 숙감(교감)을 지냈다. 만암 스님은 석전한영, 한암중원 스님의 뒤를 이은 교정과 대강백으로서 한국불교의 기준이 되는 교육의 주춧돌을 굳건히 했다.
노동은 또 다른 선이다-반선반농
“작년처럼 금당 연못을 고친다 일러라. 또 쌍계루 앞 개천에 보를 수리하고, 사찰 논에 자갈도 치워야 한다고 해라. 한 집도 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할 것이야.”
일꾼은 한 집에 한 명씩만을 부르도록 했다. 빠지는 집이 없도록 세심하게 챙겼다. 사실 연못은 멀쩡한 편이었고, 쌍계루 앞 개천의 보도 망가진 곳은 없었고, 논에도 자갈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일을 시켰다. 이른 봄에는 감나무와 비자나무 등 유실수를 심었고, 그때도 심은 그루를 헤아려 품삯을 주었다. 삯으로는 곡식을 주었다. 주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아울러 함께 살아가자는 일종의 공동체 울력이었다.
만암 스님은 승려들과 신도들에게 자급자족을 독려했다. 이른바 반선반농(半禪半農)이었다. 이러한 반선반농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선종에서 있었다. 스님은 아흔이 넘어서도 밭일을 했다. 제자들이 호미를 숨기고 하루 만이라도 쉬라고 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며 아예 방문을 잠그고 식사를 거부했다. “아무런 덕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하겠는가.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을 뿐이다.”
지역 공동체를 위한 복지와 교육에 매진한 선지식, 만암 스님의 이러한 실천은 혼란의 시기를 지내는 지금 이 시대에도 큰 울림이 있다. 지금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바를 보여주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