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남 소설가가 10년이 넘도록 투병 중인 아내를 간병하면서 틈틈이 적은 시를 묶은시집으로, 긴 슬픔과 깊은 아픔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쓴 편편이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시집 『희망사항』은 뇌출혈로 쓰러져 몸이 불편하고 치매로 영혼마저 온전하지 못한 아내에게서 일거수일투족을 떼지 않고 돌보고 챙기는 남편(남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24시간 같이 아내 옆에서 지내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온기를 십분 느낄 수 있는 시어가 독자들의 가슴을 뻐근하게 저리게 한다. 함께 산 세월이 60년이 다 된 아내가 자신의 이름이 김영자인지를 모른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60년을 같이 살면서 불러본 “여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남편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고 찢어질까? 그래서 이렇게 쓴다.
내 아내 이름은 김영자입니다/본은 연안이고/꽃불 영, 아들 자를 씁니다/그런데 아내는 자기 이름 석 자를 불러도/대답할 줄 모릅니다//아내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60년 가깝게 함께 살면서/내가 이름 대신 부르던/여보, 당신, 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나는/이름을 잃어버린 아내가/내 아내 같지 않아서/이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그래도 아내가/말을 모두 잃어버린 건 아닙니다/내가 누구지, 물으면/내 남편이라고/그것만큼은 아주 또렷이 말합니다//다행입니다/나는 그런 아내가 예뻐서/그럴 적마다 가만히 안아 주곤 합니다//내 아내의 손은 아직 따듯합니다.(「아내 이름은 김영자」 전문)
그래도 나를 알아보는 아내가 예뻐서 가만히 안아 주는 정경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시집 『희망사항』 이처럼 남산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첫 키스를 하고 부부가 된 아내가 10여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아내를 보고 느꼈을 남편의 심정과 절망과 아픔을 솔직하게 그린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모르는 아내,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모르는 아내, 자기 이름조차 잊어버린 아내를 보면서 남편이 절실하게 느끼는 삶의 질긴 비극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즘 나는 울면서 산다//한평생 시를 쓴다고 한들/여름 한낮 저 푸르름도 그리지 못하는 것을//한평생 노래를 부른다 한들/여름 한낮 산새들의 지저귐만도 못한 것을//한평생 사랑한다고 한들/여름 한낮 짝찍기하는 저 노루의 열정만도 못한 것을//요즘 나는 울면서 산다//10년 넘게 지키고 있으면 뭐 하나,/아내를 한 번도 걷게 하지 못하는 것을(「요즘 나는 울면서 산다」 전문)
아내의 팔다리 역할을 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내. 함께 외출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나는 울면서 산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남편은 아직은 아니라고 희망을 노래한다.
아직은 아니야//당신이 말하지 않아도/무슨 말을 하려는지/눈빛만 봐도 다 알아/그럼,/60년을 같이 살았는데/그걸 모를까?//그래도/아직은 아니냐/조금 더 살다 보면/좋은 날이 다시 돌아올 거야//이대로 끝난다면/그건/너무 슬프잖아/너무 아프잖아//한번은 훨훨 걷기도 하고/뛰어도 봐야 하지 않겠어?(「아직은 아니야」 전문)
간절한 희망이고, 애절한 소망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울고 생로병사는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도 옆에 숨 쉬는 아내가 있으니, 그래도 남은 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있으니 희망의 심지가 꺼진 게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차린 밥을 부부가 같이 먹는 소소한 행복, 아침 출근할 때 “일찍 들어오세요” 인사를 듣는 크나큰 기쁨, 아내의 손을 잡고 옛날 데이트 장소에 가보는 즐거움, 아내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하늘을 나는 기분, 이 네 가지 희망사항을 안고 남편은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