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연암인가?
연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열쇠말은 ‘경계인’과 ‘보기’다. 연암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교와 도가(道家), 심지어 서학까지 아우르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는 낡은 전통과 특정 사상에 갇히지 않고 객관적인 진실의 자리에 서서 지식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 도전했다.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상층과 하층, 아름다움과 추함, 조선과 중국, 법고와 창신 등 양쪽의 세계를 오가며 서로 소통하고자 애썼다. 연암은 이편과 저편을 가로지르며 상생(相生)의 길을 찾아 나선 경계인이었다.
연암은 인간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편견을 갖는 근본 이유가 본 것이 적은 데 있다고 말한다. 조선 사람들이 좁은 땅에서 태어나 잘못된 관습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갇혀 자동화된 삶을 살아간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연암은 ‘제대로 보라’고 말한다. 기존의 관습과 통념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보라고 말한다. 한쪽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복안(複眼)으로 보라고 말한다. 표면만 보지 말고 본질을 꿰뚫어, 보이지 않는 면을 보는 눈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연암 문학의 남다른 가치는 기존 지식과 권위에 대한 비판, 현실과 사물의 직접 관찰, 하찮은 것 속에서 본질을 찾는 태도,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사유의 깊이에 있다. 연암 문학에는 생각의 틀을 깨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대립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연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연암 박지원 문학의 창조성과 생태정신
《연암, 경계에서 보다》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연암 문학을 현대 이론과 연결해 연암의 현재성과 창조적 정신을 살펴보았다. 연암의 문학이 오늘날의 이론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의 창조적이고 생태적인 생각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탐색했다.
2부에서는 연암의 법고창신(法古創新)과 대대(對待)의 논리를 살펴보았다. 법고창신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편을 배척하기보다는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또한 북학(北學)의 탄생 배경을 중화사상과 화이론의 맥락에서 접근했으며, 연암과 다산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 비교하고, 명심(冥心)과 디케의 정신과의 연관성을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실학을 비판하는 논리에 대해 변증했으며 실학의 생태정신과 그 현대적 의의 등을 살폈다.
연암의 생태정신에서는 21세기 현실에서 연암의 생태정신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연암은 자연을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연암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의 소리와 몸짓이 곧 문학과 예술이 된다고 생각했다.
연암의 이용후생론에서는 이용후생이 단순한 경제적 이익과 기술적 발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문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철학적·미적 기반을 포함하는 개념임을 이야기했다. 이용후생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도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균형 잡힌 발전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환경 문제와 개발 욕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철학적 기반이 되어 준다.
저자는 30년간 연암과 더불어 살고 공부하며 그의 사상과 말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고 더 깊이 사고하는 법을 익혔으며, 더 자유롭게 상상하는 능력을 길렀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경계인 연암의 삶과 문학의 여정을 통해 ‘상생(相生)’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이 반드시 쓸모 있다
연암은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일 뿐’이므로 “범과 메뚜기, 누에와 벌, 개미는 사람과 함께 길러지는 것이니, 서로 어그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여 자연을 공격과 파괴가 아닌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연암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연암의 애정은 인간 사회의 위선과 차별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연암은 세상이 말하는 쓸모 있는 사람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없는 사람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기존 사회의 가치 판단을 뒤엎고 사회에서 낮잡아 불리는 존재들이 오히려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지와 비렁뱅이, 똥 푸는 사람 등 사회가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그들로부터 진실함을 배운다.
또한 그가 보여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존재를 향한 관심은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작은 존재를 대하는 연암의 철학은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생명체 간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철학적, 윤리적 기반을 제시한다.
연암은 닫힌 세상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우리가 자본, 권력 앞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 본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그 물음을 이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가 평생을 일군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해 간다’는 생각이 우리를 현재로, 미래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