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실패에서 배우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누구도 그럴 만한 여유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실패연구소가 실패감을 공동체 차원으로 꺼내서 다루어준 것이
두려움을 이기고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_정혜인(카이스트 학사 과정 재학 중)
“카이스트 학생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이해에서 시작해
한국 사회의 실패를 통찰하고자 하는 책.”
_정광혁(카이스트 학사 과정 재학 중)
카이스트가 연구소까지 차려가며 ‘실패’라는 키워드를 파고든 이유
시도와 좌절의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도전과 성장의 시간을 돌려주겠다는 결심
2021년 2월, 카이스트 제17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광형 교수는 “성공률이 80퍼센트가 넘는 연구 과제는 지원하지 않겠다”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과학자들이 두려움 없이 전례 없는 도전에 매진하려면 역설적으로 실패를 거듭해도 끊임없이 재시도를 할 수 있는 환경과 제도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철학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리고 2021년 6월에 문을 연 카이스트 실패연구소도 이러한 철학의 연장선에 있었다. 《실패 빼앗는 사회》는 실패연구소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카이스트 학생들뿐 아니라 학교 안팎으로 세대와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실패에서 배우는 법’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2024년 10월 실패연구소가 실시한 ‘도전과 실패에 관한 대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실패가 ‘성공에 도움이 된다’에 동의한 사람(73.5퍼센트)이 ‘실패가 성공의 장애물’(26.5퍼센트)이라 응답한 사람의 두 배를 넘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 전반이 실패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묻자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의 77.2퍼센트가 ‘한국 사회가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라고 답했고 ‘한국 사회는 한 번 실패하면 낙오자로 인식된다’라는 데 58.2퍼센트가 동의했다. 게다가 한국 사회 구성원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지원’하기(35.6퍼센트)보다 ‘무모하다고 여기고 무시’하는 경향(64.4퍼센트)을 보이며, ‘실패를 성장과 학습의 기회’로 보기(35.1퍼센트)보다 ‘부끄럽게 여기고 비난’(64.9퍼센트)한다고 본다는 인식이 훨씬 우세했다.
이는 실패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조사를 통해 실패연구소는 실패의 교훈을 전달하는 캠페인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사람들은 실패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다만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사회적 편견이 무서워 실패를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실패의 필요를 모르는 게 아니라 실패할 기회를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카이스트 실패연구소는 결국 실패했다?!
실패한 실패연구소가 찾아낸 새로운 돌파구, 과정으로서의 실패 경험에서 길을 찾다
“실패연구소는 우리 사회가 실패의 가치를 다시 보고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실패연구소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다. 이 취지에 걸맞게 실패연구소는 설립 첫해부터 참여형 연구, 세미나, 공모전, 전시 등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고, 그 결과 언론 등 외부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2023년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열린 ‘실패주간’ 행사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실패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강연이나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도 쇄도했다. 그러나 실패연구소 내부에서는 이것이 실패연구소의 ‘성공’인가 하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실패연구소의 목표는 ‘실패에 대한 인식 개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문화 조성’인데 그와 관련된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실제로 사람들에게 제대로 가닿고 있지 않는 듯했다.
여러 차례의 실패 인식 조사, 관찰과 경험 등을 통해 실패연구소는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공한 사람’과 ‘실패를 피하는 법’을 알고 싶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 크나큰 괴리가 존재하는 현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실패담은 성공한 결과를 전제로 공유된다. 그 성공은 성적, 직업, 사회적 지위 같은 객관적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된다. 그러니 정작 ‘실패로 끝난 실패’, ‘과정으로서의 실패’는 널리 퍼지지 않는다. 실패연구소도 다양한 방식으로 실패 에피소드를 수집해 공유하려 시도했지만 발굴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가설 검증에 성공한 연구 결과만 저널에 실어주는 연구 출판 관행,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결과를 나열하는 실적 보고서와 이력서 쓰기 문화 등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결과 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들고, 온전한 실패의 기록은 축소되거나 숨겨진다. 그리하여 실패는 성공의 전제로서만, 왜곡된 형태로 남는다.
실패연구소는 초심으로 돌아가 카이스트 구성원이 실제로 경험하는 실패를 좀 더 제대로 살펴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특정 주제에 대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매개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끌어내는 질적 연구 방법인 ‘포토보이스’를 알게 되었다. 특정 시간대의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는 사진을 중심으로 실패 사례를 수집하면 ‘성공 이후의 후일담’으로서의 왜곡이나 축소 없이 실패를 있는 그대로 남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 포토보이스 프로젝트에 학부생부터 석박사 과정생, 한국인과 외국인 학생, 풀타임과 파트타임 학생 등 다양한 배경과 전공의 학생 약 서른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3주 동안 ‘실패’ 혹은 ‘실패감’이 떠오르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실시간으로 올렸다. 이후 각자 포착한 실패 장면을 한데 모여 공유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비로소 실패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실패에서 배우는 법’도 자연스레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포토보이스 프로젝트를 통해 수집된 카이스트 학생들의 사진과 글, 경험담이 다수 실려 있는데, 이 자료들을 살펴보며 독자들도 저마다 경험한 실패 경험을 떠올리고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의 기반이자 전제로서의 실패만 허락하는 한국 사회,
실패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실패에서 더 잘 배우기 위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의 제안
실패에서 제대로 배우기란 쉽지 않다. 실패연구소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 나름대로 실패 학습 체계를 겨우 갖추게 되었다. 핵심은 성공한 사람의 실패 이야기나 교훈을 직접 전달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실패를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얻은 배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먼저 일상 속 실패를 관찰하고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삶에서 ‘실패’로 불리는 경험이 얼마나 다양한지, 실패가 얼마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지, 같은 실패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사진과 글로 남은 실패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원인 모를 막연한 실패감에 빠져 있기보다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일(공부)을 계속하는지 재확인하고 초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도 성과였다.
그다음 단계는 실패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실패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분위기의 대화 모임에서 학생들은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라는 공감을 얻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실패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심리적 위축감과 수치심을 완화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 모임을 함께한 학생들은 ‘워크숍 후 불안이 줄어들었다’라는 피드백을 가장 많이 보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실패 경험을 들으며, 정해진 표준이나 정답이 없는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속도와 방식을 택해도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반응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실패를 공유할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기 어렵다. 실패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숨기는 문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현실에서 단순히 실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강조하거나 일시적인 캠페인, 제도 개선 등 단편적인 접근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실패연구소가 카이스트 안에서 안전하게 실패 공유를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시도가 매우 중요한 이유다. 이런 시도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고, 실패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이 축적되어야 ‘실패 빼앗는 사회’에서 ‘실패 권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 빼앗는 사회》는 실패연구소가 어렵게 찾아낸 ‘실패에서 제대로 배우는 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공유하기 위한 책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가성비 높은 안정적 성공만 추구하는 사회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실패할 시간과 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도록 개인과 조직, 사회 전반에 관점의 전환, 행동의 변화를 촉구한다. 이 책을 계기로 한국 사회가 실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제대로 배우는 분위기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