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의 허구를 진리로 선전하는 동서양의 철학,
그 패권적 사고를 거부하는 ‘제3지대’ 주변자의 철학을 읽는다
■ 우리의 영원한 기원 ‘고향’에 대한 철학적 해석
연세대 철학과 박동환 명예교수가 2017년 펴낸 『x의 존재론』은 인간과 도시문명 중심의 패권적 관점에 갇힌 기존의 동서양 철학을 넘어서, 대문자 X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미지의 우주적 힘(힘이자 존재이자 논리)을 철학의 주제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었다. 저자는 태초의 빅뱅에서부터 시작된 미지의 X라는 존재가 소문자 x로 표현되는 개체 존재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또 x는 X의 압도적 힘 안에서 어떻게 일탈과 상상을 감행하는지, x라는 필멸의 시간적 존재가 X라는 영원의 차원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문명, 역사, 사회, 언어, 자연 등의 현상적 차원을 통해 줄곧 탐구한 바 있다.
이 책 『제3지대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이런 『x의 존재론』의 논지를 확장하여 문학과 예술이라는 미적 영역, 칸트식으로 말하면 ‘감성론’의 영역에 접근하려고 시도하는 책이다. 「별 헤는 밤」의 윤동주, 「고향의 봄」의 이원수, 여러 시편에서 언어와 시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정현종 시인,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 언어가 사라진 원시의 체험을 묘사한 한강 작가 등을 통해, 저자는 ‘고향’이라는 시적 영원성을 향해 자아를 탈출하고 해탈하려는 시인들의 시도를 읽는다. 또한 무명의 화가들이 그린 한국 민화(民畵)에서는 인간이 개발한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모두 버리고, 무념과 무위를 통한 개체 해방, X라는 초월의 차원과 x라는 개체의 차원을 이으려는 ‘사이 이음’의 시도를 읽는다. 철학자 박동환은 이 책에서 X라는 태초의 ‘고향’이 x라는 개체 생명들의 기원이요, 그것을 언제나 ‘그리움’이라는 방식으로 간직한 채 사는 것이 이 땅의 개체들의 운명임을 책의 제목과 부제를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x의 존재론』에서 『제3지대에서 바라보는 세계』까지
앞서 말했듯이, 철학자 박동환은 『x의 존재론』 이후, 같은 주제를 사회학과 역사철학, 인류학, 신학의 문제에 적용하는 후속 작업을 계속 이어왔다. 박동환 철학의 중심인 ‘x의 존재론’은 도구를 처음 사용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지성적 인류라 할 수 있는 호모에렉투스 이후, 인간 중심성에 갇히게 된 동서양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연을 도구화하고 우주의 전 존재를 인간의 틀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의 철학이었고,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이런 점에서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 철학의 출발이다. 따라서 이 철학은 중심부를 벗어난 주변부의 사고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이 있고, 그곳에서 진정으로 전체적인 관점을 가진 철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x의 존재론’은 인간과 도시문명 중심의 패권적 관점에 갇힌 기존의 철학을 넘어서, X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미지의 우주적 힘과 운명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저자 박동환은 태초의 빅뱅에서부터 시작된 미지의 X라는 존재가 x로 표현되는 개체 존재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또 X의 압도적 힘 안에서 x는 어떻게 상상을 감행하며, 그 필멸의 시간성에 갇힌 채 X의 영원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문명, 역사, 사회, 언어, 자연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설명한다.
이 책 『제3지대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이런 『x의 존재론』의 논지를 확장하여 문학과 예술이라는 미적 영역에, 칸트식으로 말하면 ‘감성론’의 영역에까지 접근하는 책이다. 칸트가 3대 비판서의 하나로 『판단력 비판』을 쓰고 ‘물자체’라는 존재론적 개념에 비견되는 미적 체험으로 ‘숭고미’를 말했듯이, 박동환은 이번 책에서 X의 차원을 미적 체험의 영역으로 옮겨와 ‘고향’ 혹은 ‘그리움’ 같은 영원과 미지의 어휘로 전하고자 한 시인과 화가들의 시도를 소개한다.
■ 시인들에게서 읽는 ‘자아 탈출’과 ‘자아 해탈’의 철학
「별 헤는 밤」의 윤동주, 「고향의 봄」의 이원수, 여러 시편에서 언어와 시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정현종, 『희랍어 시간』에서 ‘언어가 사라진 원시의 체험’을 묘사한 한강이 이 책에서 주로 거명되는 시인과 작가들이다. 윤동주는 밤하늘에 흩어진 별들을 통해, 그리고 이원수는 옛 고향의 봄 풍경을 통해, 말하는 자(verbalizer)가 아닌 그려 보이는 자(visualizer)의 입장에서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했다. 철학자 박동환은 또한 이들의 시에서 ‘고향’이라는 영원성을 향해 자아를 탈출하고 해탈하려는 시인들의 시도를 읽는다.
한편 저자에 따르면, 정현종 시인과 한강 작가는 자아 탈출과 자아 해탈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앞의 시인들이 자아 탈출을 통해 도달하려는 곳이 ‘고향’이라는 X의 영원한 차원이라면, 정현종과 한강은 그들의 작품에서 ‘언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미 니체와 러셀이 주-술 구조의 인도유럽어에서 생겨난 ‘주체’라는 환상을 지적했듯이, 정현종과 한강은 인간의 사유를 추상화, 박제화함으로써 주체에 갇히게 만든 요인으로 언어를 겨냥하고, 그 언어에서 벗어난 원시의 체험을 문학적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몇몇 시인이 보여준 언어 극복의 시도를 그저 개인적 비평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주어가 일쑤 생략되고 사라진 한국어, 그리고 행위의 중심을 주체(능동)도 객체(수동)도 아닌 중간태(중동태)적인 ‘~을 하도록 이끌어짐’으로 표현하는 고대 그리스어를 통해, 이런 철학적 관점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미적 주제는 한국 민화(民畵)이다. 한국 민화에서는 인간이 개발한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모두 버리고, 무념과 무위를 통한 개체 해방, X라는 초월의 차원과 x라는 개체의 차원을 잇는(‘사이 이음’) 무명 화가들의 시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체제를 벗어난 무한의 자연과 인간이 본래 타고난 개체성을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서 보여주는 미감의 차원을 그들은 갖고 있다고 한다.
■ 말하는 자(verbalizer)의 철학을 넘어 눈앞에 떠올리는 자(visualizer)의 철학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제3지대’란 우선 정체성 투쟁을 통하여 도달한 서양의 문명(正體爭議)이나 다툼 없는 집체성을 추구한 동양의 이상(集體不爭)을 모두 벗어난 잉여의 주변부(이를테면 한국과 같은)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언어, 논리, 추상적 개념이라는 말(verbal)의 차원을 모두 벗어나서 눈앞에 저절로 떠오르는 그림(visual)의 감성적이고 시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부제 「시와 그림에 떠오르는 그리운 고향」에서 ‘고향’이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x에게는 이미 보이지 않지만 시간을 넘어서 언제나 실재해왔던 X의 영원한 차원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철학자 박동환은 X라는 태초의 ‘고향’이 x라는 우리들 개체의 기원이자 종착점이요, 그것을 언제나 회고와 그리움의 방식으로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이 땅의 개체들의 운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