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아시아’는 지명이 아니라 사유방식이다!
한반도의 냉전은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남과 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이념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의 언어, 사고, 정치, 심지어 일상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점점 더 극렬하게.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대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안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최인훈의 아시아」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최인훈의 작품 세계를 ‘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분단문학을 넘어선 그의 지적 실험과 사유의 지형을 그려낸다. 「광장」, 「회색인」, 「화두」 등 대표작뿐 아니라 덜 알려진 평론, 강연, 미발표 원고까지 포괄하여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작가의 ‘아시아적 상상력’을 복원한다. 그렇다면 그가 냉전 속에서 꿈꾼 제3의 길, 이른바 ‘중립화’란 무엇이었을까? 최인훈과 동시대 지식인들은 남과 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느 쪽도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들이 떠올린 대안이 바로 ‘중립화’였다. 이념 진영 사이에서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언어와 철학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제3의 길’ 말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모두에서 실망한 채 끝내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그 결말은 절망이 아니다. 또 다른 희망인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문학과 역사, 철학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즉, 서구의 사유체계에 편입되지 않은 다른 목소리, 다른 해석의 방식인 ‘아시아’를 상정하여 더는 고착화한 체제 사이에서 방황하거나 정체성을 잃지 말라고 다독인다. ‘광장’이든 ‘밀실’이든 고립되지 말라고, 그러나 그 고립을 자기 질문의 출발점으로 삼아보라고 독려한다. 이념과 역사, 식민성과 정체성, 민족과 타자에 대한 고뇌가 여전히 사회 전반을 잠식하는 오늘, 이 시점에 「최인훈의 아시아」가 특히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이다.
「최인훈의 아시아」 이렇게 읽자
이 책은 최인훈의 주요 소설 9편을 분석하는 9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3편의 작품씩을 묶어서 한 장으로 구성하였다. 2장은 아시아의 공간, 3장은 아시아의 시간, 4장은 아시아의 원리로 편성하였다.
먼저 2장 ‘아시아의 공간: 냉전을 넘어선 평화의 상상력’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공간’을 살펴본다. 20세기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동아시아냉전분단체제의 성립 및 변동과정과 이에 대응한 최인훈의 정치적 상상력을 검토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은 식민지와 냉전이 가져온 억압과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였다. 최인훈 문학은 식민지와 냉전을 넘어선 평화를 지속적으로 탐색하였다. 4·19 직후 1960년대 초반 최인훈은 중립이라는 정치적인 이념을 직접 제시하였으나(「광장」), 이후 군사독재 아래에서는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지만 통일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서유기」. 1970년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누그러진 데탕트를 맞이하면서, 최인훈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 안에서 사회적 연대로서 평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어 3장 ‘아시아의 시간: 비서구 근대의 경험을 통한 보편성의 재인식’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시간’을 살펴본다. 비서구 동아시아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뒤늦게 참여하였으며, 선진 유럽을 문화적 표준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지체된 아시아의 문화적 후진성을 마주하였다. 1960년대 초반 최인훈은 아시아의 문화적 식민지성을 교양(서구적 이념)과 경험(아시아의 역사적 현실)의 불일치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성급한 서양 문화의 이식으로 인해, 한국문화가 건강한 전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진단하였다(「회색인」). 이후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 최인훈은 한국현대문학의 역사 그 자체가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한 ‘전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보편성을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총독의 소리」).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반 최인훈은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20세기 초반 한국 작가들의 꿈이었던 탈식민화와 사회적 연대가 가진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었다(「화두」).
마지막 4장 ‘아시아의 원리: 연대와 공존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사의 원리’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원리’를 살펴본다. 근대 유럽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비서구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선진국으로 자부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를 억압하거나 환경 파괴를 초래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최인훈은 근대 유럽 중심의 세계사 인식을 점검하는 한편, 개별 국가 단위가 아니라 문명권 단위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성을 확인한다(「주석의 소리」). 특히 식민지 시기와 겹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서, 여러 민족이 갈등을 조정하며 공존할 지역 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두만강」). 나아가 최인훈은 침략과 연대가 얽혀 있는 ‘아시아주의’를 역사적으로 성찰하며 근대 유럽 중심의 세계사 인식을 상대화하고, 개별 국가를 넘어선 공존과 조절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사 인식을 제안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 양(탈식민 저개발 국가)도 아니고 사자(제국주의 국가)도 아닌 상태의 공존과 조절 가능성을 제안한 것이다(「태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