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의 전파와 함께 선조 때 시작된 당쟁의 역사
“유암한 군주 아래, 그들만의 나라를 꿈꾸다!”
당쟁의 기원에 대해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중종반정 이후 공신으로 자리 잡은 훈구파와 새롭게 정치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립을 당쟁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쟁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었다. 사림 내부의 투쟁, 즉 온건 사림과 급진 사림 간의 충돌과 이합집산이 핵심이었다. 둘째는 선조 때 이조전랑(吏曹銓郎) 추천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당쟁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분열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지, 이 충돌은 당쟁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만으로는 당쟁의 본질을 설명하기 어렵다.
조선 당쟁은 주자학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당쟁의 불씨가 지펴졌다. 공자의 정치철학을 담은 『논어』와 『주역』의 핵심인 ‘강명한 군주론’ 아래에서는 군주를 배제한 신하들 간의 당파 싸움은 원천적으로 부정된다. 즉, 강명한 군주가 존재하는 한 당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공자의 철학을 다르게 해석한 주자학이 전파되고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쟁은 있을 수 있는 일이자 당연한 일로 변했고, 왕이 중용한 신하에 대해 ‘소인’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불경(不敬)조차 서슴지 않았다. 주자학의 시대가 곧 당쟁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조선의 당쟁을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사상적 변화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 바라본다. 당쟁의 본질과 그 파급력을 깊이 파고들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전한다.
권력을 잡은 당파는 결국 분화하고,
탕평이 무너진 자리에 척신 의존 정치만이 남다!
조선의 정치에는 선조 이전부터 주자학적 관념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시(國是)’ 와 ‘공론(公論)’ 을 바탕으로 임금과 사대부가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는 원칙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적통(嫡統)이 아닌 선조가 즉위하고, 주자학자들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당쟁이 본격화되었다. 선조가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에게 시호를 추증한 것은 사림 세력의 복권이자 당쟁의 서막이었다.
당쟁의 핵심은 권력 장악 여부였다. 선조 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한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며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충돌했다. 반정과 왕권 변화에 따라 서인은 정권을 잡았지만, 내부에서 소론, 노론, 시파, 벽파 등으로 분화되며 당쟁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쟁이 지속된 이유는 정치적 형세와 인적 자원 때문이었다. 서인-노론-벽파 계열에 인재가 몰리면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왕 역시 이들에게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서는 소론, 노론 내부에서는 시파가 분리되는 등 당쟁은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조선 임금들도 당쟁을 극복하려 했다. 영·정조는 ‘탕평’을 내세웠지만 방식이 달랐다. 영조는 당파 간 균형을 맞추려 했고,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두 임금 모두 집권 후반부로 갈수록 척신 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며 당쟁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조선 당쟁사의 흐름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연구와 통찰을 통해 우리는 당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오늘날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구조를 성찰할 수 있다. 당쟁이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무너뜨렸는지 돌아볼 때, 현재의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쟁의 역사는 과거의 일이기만 한가? 혹은, 우리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