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정치는 요리하듯이 하라!”외교와 민생 그리고 왕권의 확립까지수라를 둘러싼 조선 역사를 읽다!
“밥은 백성에게 하늘이고, 백성 없는 왕의 밥상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수라상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 수라간은 궁궐에서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 중 하나였다. 수라에는 왕 한 사람만을 위한 대단히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사용되었고,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금기시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수라와 관련한 기록과 정보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자료를 바탕으로 수라와 긴밀하게 연결된 조선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정리했다. 수라와 조선의 역사를 연결 짓는 일은 절대 권력자였던 왕이 가장 높은 곳이면서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궁궐에서 나라 살림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살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밥은 백성에게 하늘이고, 백성 없는 왕의 밥상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의 밥상에서부터 시작되는
조선의 정치 이야기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학(儒學)에서는 자연재해나 하늘에서 이상 징후가 발생하면 천견(天譴), 즉 하늘이 꾸짖으며 큰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왕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 근신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다. 철선(輟膳) · 감선(減膳) · 소선(素膳) 등은 왕의 밥상과 관련한 근신으로 모두 ‘나라에 큰 재앙이 발생했을 때 왕이 하늘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두려워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한다’는 의미였다. 그중 철선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고 감선은 왕의 밥상에서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었으며 소선은 고기 먹는 것을 중지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왕이 주도하고 통치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정치 수단이기도 했다. 자연재해로 20회 이상 감선을 선언한 왕으로는 성종 21회, 중종 28회, 영조 89회, 정조 29회가 있다. 특히 영조는 감선을 선언하며 기간도 함께 공표했고 자연재해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감선했는데 여기에는 대신들을 통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을 대상으로 왕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등 다양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역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교양 강의와 대중 역사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김진섭 작가가 역대 조선 왕들이 수라를 어떻게 정치에 이용했는지 주목하며 왕권을 중심으로 생겨난 대신들의 권력 다툼, 요리사와 환관들의 부정 비리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역사 속 이야기들을 묶어 《왕의 밥상: 수라와 궁궐 요리사 그리고 조선의 정치》를 펴냈다.
이 책은 왕뿐만 아니라 왕과 요리사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조선 건국부터 이후 외교 문제까지 요리사는 정치에 빠질 수 없는 역할이었다. 태조의 조선 개국 공신이자 조선 최초의 공식 궁궐 요리사였던 이인수, 세종 대에 명나라와의 외교를 위한 요리를 맡았던 이교, 사신 접대에 특별히 파견됐던 고기 요리를 전담하는 별사옹(別司饔), 명나라의 요구로 공녀와 함께 떠난 집찬비(執饌婢) 등 수라와 잔칫상을 오간 요리사들이 남긴 발자취를 빼놓지 않았다.
반면, 사가에서 인기 있었던 궁궐 요리사들이 관리들에게 사적으로 불려 나가 논란이 되어 처벌받거나 역모와 같은 정치적 혐의에 휘말리게 된 이야기, 사옹원 제조 유자광이 왕에게 아부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보려 했던 이야기, 도설리 박경례를 비롯한 환관들이 수라를 통해 부정 비리를 저지른 이야기와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던 김홍륙이 수라간에서 일했던 공홍식과 김종화를 시켜 고종을 독살하려 했던 사건 등 왕의 권력을 이용해 부정 비리와 역모를 꾀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잔칫상으로 역대 왕들의 왕권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다. 왕권이 강했던 영조의 경우 영조의 기로소(耆老所) 가입을 축하하는 내연과 외연 모두 성대하게 이루어졌고 준비 과정에서 각 부서의 역할 분담도 체계적이었던 반면, 왕권이 약했던 광해군은 부모의 제사였음에도 잔치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요리사의 인원이 충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잔칫상 역시 왕실에서 준비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또한 왕이 주관하는 행사인 노주연(勞酒宴)임에도 예조판서가 참석하지 않는 등 왕권에 따른 대신들의 태도도 엿볼 수 있다.
왕의 밥상을 이루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삶을 조명하다
수라와 왕이 베푸는 잔칫상 등 왕의 밥상에는 왕을 포함한 왕실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의미들이 담기게 된다. 그러나 왕의 밥상이 화려하고 풍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 왕과 왕실에서의 낭비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고, 솔선수범해서 근검절약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정치가 왕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이면서 왕과 왕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종이 사옹(司饔) · 사선(司膳)에서 잡물(雜物)을 실어 나르는 말의 등을 호랑이나 표범 가죽으로 덮는 것을 알게 되자 가죽의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했으며, 단종이 어선(御膳, 왕에게 올리는 음식)을 사냥하는 군인들의 식사 문제가 거론되자 “이제부터는 수라상을 위하여 사냥을 하지 말라”고 명한 일이 그 예다. 또한 현종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진상품의 가짓수를 제한하고 값을 지불하라고 명했고, 정조는 초목이 무성하여 특별히 꿩을 사냥하는 어려움을 염려하여 “사옹원에서 매일 올리는 산 꿩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바치라”라고 명한 일도 있었다.
특히, 작가는 궁궐에서 일하는 신하들을 배려한 왕들의 정치도 살폈다. 궁궐에서 제공되는 밥상은 왕에 대한 감사와 충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해서 나랏일을 제대로 하라’는 책임감과 격려 등 공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이는 모든 정치의 시작은 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세종은 인덕궁 시녀들에게 마땅히 선반과 방자(房子)와 밥을 짓고 물 긷는 사람들을 붙이고, 환관을 정하여 고찰케 해야 한다고 명했으며, 예종 즉위년과 성종 즉위년을 거쳐 왕실에서는 어린 시절의 왕을 보살폈던 유모와 보모 그리고 이들을 시중들었던 여종 모두에게 왕실 가족에 준하는 예우를 갖췄다. 또한 예종 대에는 궁궐 출입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계를 서던 말단 병사들과 당직자들에게도 식사를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대에는 대전을 비롯한 대비전 등의 말단 관원과 노비 등 정해진 일원들에게 지급되는 봄과 가을 의복, 봉급 등을 규정으로 정하면서 식사도 제공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러한 대우에서는 왕실의 존엄성 유지와 강화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정치를 중심으로 한 통치자와 요리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이 수라를 통해 정치를 어떻게 요리했는가를 살피고 있다. 왕의 밥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사건들이 엮여 있다. 이러한 전개는 평소에 쉽게 접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수라간 여관(女官)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왕이 주관하되 주변의 대신들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백성들의 노고도 담긴 왕의 밥상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