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선불교의 출발점
「육조단경」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이자 선종의 6대 조사인 혜능(慧能, 638-713)의 어록이다. 일반적으로 ‘경(經)’이라는 호칭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는 문헌에 대해 붙는 것이지만, 「육조단경」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經)’이라는 호칭을 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선종,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한국 선종에서 「육조단경」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담은 문헌만큼이나 추앙 받아 왔음을 보여준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상 속에서 펼쳐진다
석가모니는 남녀노소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가르침을 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아무래도 재가 신자보다는 출가 수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그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에 머물렀을 뿐 감히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후에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재가 신자의 위상이 올라갔고, 누구든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아라한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부처까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와도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한 길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 역시 요원한 것이었다.
「육조단경」은 불교가 안고 있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정확하게 응답한다. 여기서 혜능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일상의 삶을 통해 걸어갈 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 역시 일상의 공간에서 펼쳐진다고 가르친다. 이를테면 불교적 이상향으로서의 정토세계라는 것은 서방(西方)이라는 멀고 먼 물리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청정한 것을 가리킬 뿐이다. 또 그러한 정토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 가지 악행을 하지 말고 열 가지 선행을 하기만 하면 된다. 수행에 있어서도 굳이 까다로운 형식을 따를 필요 없이, 걷고 머물며 앉고 눕는 일상적인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될 수 있다.
중생은 본래 깨달은 존재
「육조단경」은 불교가 모두를 위한 가르침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육조단경」은 대개의 불교 경전이나 논서와는 달리 사변적인 가르침보다는 혜능의 생애에 있었던 구체적인 일화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일화들에 담긴 의미를 일반인이 속속들이 파악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육조단경」은 「육조단경」이 그려내는 일상 속 깨달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왜 혜능이 일자무식의 이미지로 그려졌는지, 왜 혜능을 둘러싸고 중국 선종사의 법맥 논쟁이 일어났는지와 같은 의문들을 실마리로 하여 「육조단경」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이를 통해 「인문학 독자를 위한 육조단경」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해 혜능이 말하고자 했던 참뜻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혜능의 선풍은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 혜능이 말하는 수행이란 이미 깨달아 있는 상태에서 그 깨달음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이 따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