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의국가인가
국가는 왜 필요한가. 저자는 서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가가 존재해야만 하는 근본적 이유에서부터 이상적인 국가모델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맹사상을 인용하여 국가의 존립기반은 국가에 대한 백성의 믿음〔民信〕이며, 민신의 내용은 족식足食과 족병足兵, 균제均齊라고 본다. 곧, 국가는 구성원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양민養民과 교육·문화복지를 제고하는 교민敎民의 ‘인정仁政’과 경제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균제의 ‘의정義政’을 시행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모성애, 동정심 등의 사랑〔仁〕이 정의보다 앞서는 도덕철학인바, 인정을 우선하되 의정을 함께 갖춘 인의국가가 앞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임을 주장한다. 인의국가는 공맹의 인정국가론, 대동국가론과도 다르다. 이러한 인의국가론은 저자의 단계적 논증의 정점을 이루는 대전제가 된다.
유교제국과 서구의 국가변동의 역사
그렇다면 역사 이래로 동서양의 국가는 인정과 의정을 어느 정도 시행해 왔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극동極東 유교국가의 사회정책을 서구 여러 나라의 그것과 비교 분석한다. 중국 고대 사상서 《주례》에 집약되어 있는 대동적大同的 인의국가의 정책 가운데 의정은 사실상 역대 유교국가들에서 거의 현실화되지 못하였고 인정 정책이 면면히 시행되어 왔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도 양민과 교민복지를 우선으로 한 인정국가였다. 서구에서는 고대부터 플라톤을 비롯한 정의국가론이 우세하였으나, 16세기 말부터 17, 18세기에 걸쳐 중국의 복지국가론이 여행가와 사상가 등을 통해 전해져〔西遷〕 서구에서도 고아원·양로원 등 양민정책과 학교제도의 교민책이 시행되어 나가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서술한다(제2장). 곧 저자는 공맹사상과 유가적 복지론의 흐름을 면밀하게 고찰하여 근대에 관한 통설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서양의 선진적 문명제도와 관념이 동양에 뒤늦게 수입되어 근대가 확산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동양의 인정제도가 서구에 영향을 주어 복지·학교제도 등 서구문명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제3장에서는 서구 정의국가의 역사를 고대 카스트적 정의국가론에서부터 야경국가적 정의국가(아담 스미스)를 거쳐 현대 계급적 정의국가까지 훑으며 현대 정의국가가 20세기에 자체 붕괴했거나 붕괴 위기에 맞닥뜨린 현실을 추적한다.
한국의 미래 구상
서구의 계급적 정의국가는 계급갈등을 야기하고 만성 적자재정에 시달리며, 동양의 인정국가는 의정을 등한시해 온 한계를 드러냈다. 저자는 두 국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 4차 산업혁명시대 산업구조 변동과 중도주의노선과 네오파쇼세력의 발호 등 정치변동을 분석하여 좌우의 중도세력이 추동하는 인의국가가 새로운 국가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힌다. 나아가 인의국가 달성을 위한 개혁을 복지·교육·경제·정치의 각 분야별로 제시한다. 동서비교철학적 논변을 정치하게 깔고 단계적으로 주장을 펼쳐나가는 저자의 논지 전개 방식은 설득력을 더욱 높여 준다. 특히 넓은 시야와 구체적 사례에 입각한 논증은 그 타당성을 명쾌하게 입증시킨다. 균제를 위한 경제개혁안 가운데 현대의 종업원 주식소유제가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의 대동적大同的·인의적仁義的 개인소유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논하는 부분이 그 예이다. 아울러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의 복지개혁안으로는 기본소득제도를 들면서, 핀란드와 이탈리아 등 기본소득 실시 사례에 기반한 장단점과 대안을 분석하여 장기적 관점에서 점진적 도입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정치개혁의 일순위로서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철폐를 강조한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소선거구제 폐지와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안을 체계적으로 상술한다. 세계 각국의 정체를 비교 분석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계엄 사태 이후 대통령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지금 매우 시의적절한 대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전년보다 10계단 하락한 32위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은 한국이 가장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사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AI 등 첨단기술의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서 도약하느냐 도태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바로 이때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는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포함한 광범한 개혁 청사진을 제시한 이 책은 실로 이 시대의 정치적 좌표로서 눈여겨 정독해야 할 문헌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한국 정치인들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의 필독서이자 미래를 대비하는 한국인들의 지침서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애’의 가치로써 기존 국가상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황태연 교수의 이 작업은 세계 민주시민사회의 새로운 등대이자 한국사회과학의 승리로 자리매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