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쓸어야 한다면
너 그리워 흘린 연분홍 눈물을 쓸겠네
온전히 지워 다음 봄이 새봄이 되도록
- 「봄을 쓸다」
시인은 사진 속의 떨어진 꽃잎들을 “너 그리워 흘린 연분홍 눈물”이라 부른다. 죽은 사물을 이렇게 몸속에 각인된 슬픔으로 건드릴 때 사물은 정동되고, 멈춰 있던 영사기가 다시 돌아가듯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미경의 디카시는 이렇게 정지된 사진(스틸 컷)을 움직이는 영상(동영상)으로 바꿔 놓는 독특한 기술을 보여준다. “온전히 지워 다음 봄이 새봄이 되도록” 봄을 쓸겠다는 문장은 마치 강력한 프로펠러처럼 꽃잎들을 더욱 활발한 가속 운동의 공간으로 내몬다.
나는 출렁이고 너는 단호해서
슬픔이 생겨났다
지우고 뭉갠 덩어리 하나
목구멍을 역류한다
- 「그리움의 얼굴」
출렁이는 “나”와 단호한 “너”는 사장된 물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두 개의 몸이다. 이들이 살아 있지 않다면 부딪힌다고 정동이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출렁이는 정동을, ‘너’는 단호한 정동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움직이는 두 개의 ‘몸’이 부딪힐 때 그 접선(tangent)에서 정동의 새로운 “덩어리”가 생겨난다. “슬픔”은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강도의 정동이다. 정동은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그것은 속도와 방향을 가진 감성이며 움직이는 몸의 신호이다. “지우고 뭉갠” 덩어리엔 내장의 깊은 고통이 고여 있다. 두 개의 몸이 부딪힐 때, 그 슬픔이 “목구멍을 역류한다”. 제목(「그리움의 얼굴」)처럼 화자는 그렇게 지워지고 뭉개진 “덩어리 하나”를 뼈아프게 그리워하고 있다. 화자의 “그리움” 속에, 단단한 구조물과 계속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움도 움직인다. 멈춰 있는 몸은 없다.
이처럼 신미경 시인은 죽은 표피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녀는 마른 표피 아래에서 늘 생성하고 변화하는 몸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그녀의 시선은 잔잔한 수면 아래의 거대한 물살처럼, 말라붙은 표피 밑에서 움직이는 욕망과 감성의 덩어리들을 놓치지 않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신미경에게 새롭지 않은 정동이란 없다. 정동은 움직이는 정서이며 끊임없이 생성하는 욕망의 벡터이다. 그녀는 죽음을 가장한 세계를 휘저어 깨운다. 엘리엇(T. S. Eliot)의 “4월”처럼 신미경은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그녀에게 몸은 정동의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이고 다른 정동을 만나 주름을 만드는 공간이며 계속해서 새로운 정동으로 변화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신미경에게 기억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확장된, 확장하고 있는 시간이다.
꽃의 시절을 지나온 여자는
맨발의 외로움이다
발이 뜨거워져도 돌아보지 않는다
- 「기억의 물결」
정동에 대한 신미경의 민감한 자의식은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에게 기억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물결”이다. 그녀는 정지된 사물과 정지된 인간과 정지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녀는 예술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깨워 흔드는 일임을 안다. ‘낯설게하기’란 예술의 본원적인 기능은 바로 죽은 듯 잠자고 있는 세계를 흔들어 깨워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사진 속의 여성을 “꽃의 시절을 지나온 여자”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움직이는 기억이 된다. 그녀는 한 때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을 보냈으며 지금은 “맨발의 외로움”이 되었다. 그녀에게 ‘꽃의 시절’은 사라져 죽은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만드는 문턱이다. 그녀는 비록 맨발의 외로운 신세이지만, 이미 ‘꽃의 시절’을 경험하였으므로 현재 그 시절을 보내는 연인들에게 관심이 없다. 어느 시간이든 영원히 정지된 시간이란 없으며, 하나의 시절은 다른 시간의 주름을 만든다. 맨발의 외로운 시간 또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펼쳐져 또 다른 시간의 주름이 된다. “발이 뜨거워져도” 그녀가 꽃의 시간을 뒤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신미경은 디카시를 쓰기 이전에 이미 10여 년 동안 사진 작업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디카시 사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탁월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문제는 디카시라는 장르가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의 화학반응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디카시는 사진이든 문자든 어느 한쪽의 ‘배타적 완결성’을 거부한다. 사진이 훌륭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진의 배타적 완결성이 문자 기호를 압도해서 양자 사이의 화학반응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사진 작품이 될지언정 훌륭한 디카시는 되지 못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오민석 교수는 해설에서 “신미경의 디카시는 탁월한 사진 실력에 못지않은 언술 실력으로 사진의 배타적 완결성을 잠재운다. 그녀의 문자는 사진을 흔들어 깨우고, 자칫 화석화될 수도 있을 사진에 정동의 입김을 깊이 불어 넣으며, 그렇게 깨어난 사진은 다시 문자 기호와 어울리면서 살아 있는 감성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그녀의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는 이렇게 서로를 살리며 오로지 디카시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특한 미적 공간을 생산한다.”고 평한다.
어둠을 더듬던 어느 구석
가슴을 뚫는 빛줄기
내가 켜지는 순간
- 「뮤즈」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이 작품은 신미경 시인의 디카시 창작 현장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쏟아지는 빛에 노출된 붉은색 열매들은 전등처럼 환하게 어둠을 밝힌다. 시인에게 문학은 “어둠을 더듬”는 촉수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감추고 있는 어둠을 까발리고, 어둠과 싸우며, 끝내 어둠을 이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발화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른 몸과 만나는 순간에만 점화된다. 빛줄기가 빗줄기처럼 시인의 “가슴을 뚫”을 때, 시인의 몸이 점등된다. 점등된 몸은 뮤즈가 찾아든 공간이며 시인과 뮤즈 사이의 활발한 대화가 생성되는 자리이다. 달력 사진처럼 너무 말끔해서 오히려 화석화될 수 있는 이미지를 이렇게 문자 기호가 흔들어 깨울 때, 사진 속의 빛다발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환하게 점등되는 붉은 열매들의 장면이 동영상처럼 펼쳐진다.
저 속에 무엇이 들어 이리 흔드는가
짙고 옅음이 빽빽하고 성김이
서로의 몸을 갈아타는
치열했기에 덧없음을 안다
- 「바람의 환승역」
신미경의 디카시들은 몸과 몸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짙고 옅음”, “빽빽하고 성김”은 서로 다른 강밀도를 가진 몸들이다. “바람의 환승역”에선 몸들이 서로의 강밀도를 교환하며 “서로의 몸을 갈아”탄다. 몸이 다른 몸을 갈아탈 때 치열한 흔들림(“저 속에 무엇이 들어 이리 흔드는가”)이 발생한다. 사진은 몸들의 깊은 교차에서 일어난 바람이 나뭇가지에 남긴 그림자이다. 문자 기호가 이 사진을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사진은 죽은 고인돌처럼 누워 있을 뿐 아무 바람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미경의 문자 기호는 죽은 사변(思辨)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내장의 목소리이다. 그녀의 디카시에서 몸의 목소리와 사진은 접점의 각도와 방향과 속도에 따라 매번 다른 움직임을 생성한다.
신미경의 디카시들은 오래 연마한 사진 기술과 그에 버금가는 언어의 연금술이 만나 절실하고도 행복한 미의 영역을 생산한다. 좋은 디카시의 훌륭한 모델이므로 디카시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읽고 디카시의 새로운 출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얻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