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앞부분에 실린 소설들은 작가의 작은 상상력에서 출발해 천천히 형태를 갖추어 탄생한 작품이다. 표제작인 〈비포 선라이즈 게임〉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1년 후의 만남을 약속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영화 같은 장면과 대화 사이로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들이 끼어든다.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지 않은 남녀의 또 한 번의 만남을 기대하며 독자들을 끝까지 붙잡는 이 이야기는 드라마의 어느 장면 같기도, 한 장의 스냅사진 같기도 하다. 〈어느 책의 생애〉는 책의 시점으로 주인공의 일생을 따라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 짧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독자들 또한 오래 간직해온 책 한 권이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검은 가방〉은 서점이 배경인 미스터리한 이야기로, 실제인지 허구인지 알기 어려운 묘사와 기가 막힌 반전으로 여운이 센 단편이다. 이밖에도 치앙마이를 무대로 멀어진 친구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개와 에어컨이 없는 가게〉, 누구나 겪을 법한 관계의 곤란함을 다룬 〈죽은 척하기〉, 뜻밖의 추억을 상기시킨 짧은 여행담 〈오하라의 하룻밤〉, 한 여성이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어른을 만나며 겪는 미스터리 서스펜스 〈그가 지운 것〉, 시각장애인 여성과의 로맨틱한 관계와 파국을 그린 〈문스트럭〉까지 쉬이 잊히지 않는 단편들이 한데 묶였다.
밤의서점을 지키는 점장의 또 다른 얼굴들
타인에 공명하는 아홉 편의 에세이
저자의 일상을 이루는 키워드는 책과 서점과 고양이이다. 단출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겪는 감정의 파고는 만만하지 않다. 서점은 오랜 로망이 현실화된 꿈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끊임없는 고민을 안겨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독립서점 점장으로, 책을 번역하는 번역가로 살아가며 책과 독자 곁에서 취향과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과정이 아홉 편의 에세이로 담겼다.
늦은 저녁 어두운 길목을 비추는 작은 불빛. 동네 서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에 자리한 밤의서점에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발을 들이는 걸까. 그 낯선 이의 마음을 10년째 한결같이 보듬어온 밤의점장의 첫 책은 주인장을 꼭 닮았다.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이어도 결국 모두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기에 다른 이의 평범함과 특별함을 모두 이해하며, 책과 글 옆에서 오래 머물러온 시간이 있기에 책을 사랑하고 글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린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서점을 오간 손님들과 서점을 운영하면서 응원을 건네준 사람들과 이 책으로 ‘밤의서점’을 처음 알게 될 독자에게까지 다정한 손길을 내민다.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