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인류의 공동 자산, 그런데 누가 과학을 독점하는가
인조 모피 가운데 피나텍스(Piñatex)가 있다.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가 2013년 개발했다. 히요사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얻고 아나나스아남(Ananas Anam)이란 회사를 세워 피나텍스를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파인애플 잎을 이용하는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가죽 대체재로 주목받아 나이키, H&M, 휴고보스 등 유명 브랜드가 이 소재를 이용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필리핀 선주민들은 이미 몇백 년 전부터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피나 직물을 만들어 왔다. 선주민들이 피나 직물을 만드는 과정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정도다. 히요사는 필리핀에서 가죽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선주민들의 이 방법을 배웠다. 이렇게 피나텍스가 나오기까지 필리핀 선주민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아나나스아남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돌아간다. 선주민들의 노력에 대한 인정과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요사가 현대적 기술로 재해석했다고 해서 전통 지식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과학은 인류가 함께 만든 공동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인류 모두가 과학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피나텍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학은 소수의 손아귀에 독점되면서 그들이 이익을 얻는 데 주로 쓰이고 있다. 이런 양상은 현재 매우 지배적이다. 빅테크 기업은 인공지능을 독점하면서 ‘인류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제약 회사는 터무니없는 약값을 매기면서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학과 연구소는 기업의 돈줄에 더욱 의존해 연구하면서 ‘생명 윤리’를 외친다.
이 책은 자본과 권력에 봉사한 과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한편,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선 과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어려운 이론이나 복잡한 기술 이야기보다 과학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과학을 노동자와 민중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풍부한 사례 제시와 일관된 관점이 장점이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AI 시대의 과학까지, 근현대 과학 이야기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를 중국에 팔지 말라고 하면 못 판다. 네덜란드 기업인 ASML은 미국의 요구에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를 팔지 않으며, 이미 판 물건에 대한 유지·보수 업무를 하지 않는다. 기업이야 어디든 팔아 매출을 올리는 것이 좋지만 미국이 금지하면 팔 수가 없다.
미국이 깡패라서가 아니다.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반도체와 관련한 ‘표준필수특허’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처음 만든 기업은 미국 기업이고, 압도적인 기술로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간 나라는 미국이다. 1980년대에 일본이 치고 나가지만 메모리 반도체 부문이었고, 인텔이나 AMD 등 핵심적인 칩을 만드는 기업은 모두 미국이었다. 반도체 관련 연구의 최첨단 영역도 미국 몫이 가장 크다. 현재는 쪼그라든 것처럼 보이지만, 반도체 제조와 관련한 기업은 미국이 가장 많다. 한국이나 네덜란드 등의 반도체 기업은 이들의 특허를 허락받아 쓰고 있다. 미국이 이 특허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만들 수도 팔 수도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제재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21세기 AI 시대의 과학까지를 쓴 근현대 과학 이야기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과학이 어떻게 식민지 수탈과 인종차별의 도구로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생물자원 약탈부터 인종론과 우생학까지, 과학이 제국주의에 복무했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2부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거대과학의 발전 과정, 의약품 특허권을 통한 이윤 추구, 그리고 과학기술의 사유화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과학의 경험이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대안적 과학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지식과 기술의 공유 운동, 제3세계 과학기술 운동, 그리고 소수자를 위한 과학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민중의 편에 선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도 라자스탄주의 틸로니아 마을에 맨발의대학이라는 곳이 있다. 1972년 세워진 이 대학에서 300만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대학이라기에는 너무 허술하다. 교실은 흙바닥이고 의자가 없다. “가난한 학생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한다.
학생이 배우는 것은 태양광 램프와 물 펌프를 제작·설치·수리하는 기술이다. 마을 단위로 학생을 선발한다. 해당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태양광 패널과 물 펌프에 낼 요금을 결정하고 마을위원회를 구성해 학생을 선발한다. 되도록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의 여성을 선발하며, 가끔 노인을 뽑는다. 많은 학생이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교사와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하는데, 인도는 언어가 많아서 이런 일이 생긴다. 학교 입학에는 조건이 없다. 선생님에게 어떤 자격증이나 학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해당 기술을 가르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뽑힌 학생은 6개월 동안 교육받는다. 물론 기술 교육만 받는 것은 아니다. 독서, 쓰기, 회계 수업을 함께 받는다. 대학이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학위와 자격증이 없다. 졸업 자격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자기 집에 가져갈 그림 설명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은 노동자와 민중의 시각에서 쓴 과학 이야기다.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일관된 관점으로 과학 독점의 역사를 파헤친다. 그러면서 책의 마지막에는 ‘민중의 편에 선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집중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노동자와 민중의 과학을 이야기하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은 과학적 데이터로 무장하고 자본의 탐욕에 맞서 싸우며,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분석하면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다. 그리고 농민들은 기후 위기에 맞서 대안적인 농법을 연구한다. 이미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과학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과학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맨발의대학처럼 민중과 함께하는 과학교육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고, 브라질의 민중 과학 운동처럼 대안적 과학기술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