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자율성을 박탈하는 공간
시설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장애인, 노인, 아동, 노숙인 등 수용 대상이 다양하고, 같은 장애인시설도 목적, 규모, 운영 방식이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모든 시설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설에 머무는 이들은 시설장과 직원의 ‘관리’ 아래 놓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잠자는 생활이 반복된다. 사소한 일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올 때마다 시설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람과 동침하거나,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지려고 해도 시설 안에서 임의로 가능한 것이 없다.”(196쪽) 이렇게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스스로 일상을 꾸릴 권한을 박탈당한다.
요양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뇌병변장애인 조상지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시설에서는 생각을 하면 괴로웠기에 생각을 멈추는 것이 곧 시설에 ‘적응’하는 일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시설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고민할 일도 없어요. 시설에서 정해준 것만 하면 되니까요. 먹고 싶은 걸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요. 어차피 시설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까요. … 생각을 하면 내가 괴로우니까 점점 생각을 안 하게 됐어요. 그게 적응 아닐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어차피 나는 시설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포기한 게 시설에 적응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36~37쪽)
이런 현실은 ‘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시설에 가야 한다’는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다. “장애를 지닌 이가 반드시 불능/무력하기 때문에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설에 들어갔기 때문에 불능화/무력화”(59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력해진 장애인들은 쉽게 ‘통제’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같은 방에서 거주하는 사람 수를 줄이고, 활동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시설 문제는 학대와 인권침해가 발생한 일부 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와 강요, 차별과 폭력이 생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설”(151쪽) 자체의 문제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나아가 시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탈시설로 먼저 나아간 나라들이 입증한 것
저자들은 이미 그 길을 선택한 외국 사례를 통해 소위 선진국 시설도 인권을 보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400명 규모 건물에 3,000명에 달하는 발달장애인이 과밀수용되고 바닥 닦기 등의 강제 노동 때문에 거주인의 손과 무릎에 거대한 궤양이 생겼던 휴로니아(캐나다), 아동과 청소년을 상대로 신체 구금을 비롯한 각종 신체적·성적 학대를 저지르고 약물 오남용 등을 자행한 레이크 앨리스 정신병원(뉴질랜드), 거주인의 뼈가 부러져도 치료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방에 사람들을 모아둔 채 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로 목욕을 대신한 펜허스트 주립학교(미국)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설의 학대와 인권침해를 목격한 뒤, 캐나다·뉴질랜드·미국 등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시설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후 여러 학자들은 탈시설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시설에서 사는 것보다 지역사회에서 사는 것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도 좋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례로 제임스 콘로이 박사가 펜허스트 시설에 살다가 지역사회로 나온 사람 1,154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의 자립성이 증대했고,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말한 사람이 두 배로 늘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탈시설 관련 연구가 대형 시설·소규모 시설·지역사회 중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가장 좋은 삶의 형태임이 명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탈시설을 둘러싼 우려와 반론
탈시설로 나아간 여러 나라의 사례와 탈시설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이 이미 있지만, 탈시설을 둘러싼 우려가 분명히 존재한다. 당사자가 정말 시설을 나가고 싶어 하는지, 시설 직원들의 일자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어나는 예산을 감당할 수 있는지 등등 탈시설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놓고 여러 우려가 제기된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런 의문들에도 답을 제시한다.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 번째는 ‘정말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우려는 장애인 당사자와 지역사회 양 측면에서 제기된다.
우선 장애인 당사자가 시설을 나와 범죄 피해자가 되는 등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다. 돌보는 사람이 장애인을 학대하면 오히려 단둘이 있는 집이 시설보다 위험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질문의 방향을 돌려 장애인에게 어디가 더 안전한지 묻는 대신 어떻게 장애인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해답은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안전은 장소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강화를 통해 확보해 나갈 수 있다.”(196쪽) 가족과 친구가 어떤 장애인을 자주 방문하고 그의 일상과 건강에 관심을 보이면, 그 사실을 주위 사람도 알면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계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장애인거주시설은 개인 주택보다 불리한 점이 많다. 장애인시설이 대개 도심 외곽에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기 어렵고, 시설이 도심에 있어도 방문객을 개인적으로 만날 공간이 마땅치 않거나 외부 사람이 방문하려면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단, 실제로는 탈시설에 성공한 장애인도 사회적 관계를 충분히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반드시 지역사회가 시설보다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역사회 내 장애인이 여러 지역사회 구성원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탈시설은 단지 삶의 공간을 지역사회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삶의 관계가 지역사회에서 맺어져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226쪽)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걱정과 반대로 장애인이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는 도전적 행동을 해 지역사회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제임스 콘로이의 연구가 도전적 행동이 심한 최중증 발달장애인도 지역사회로 나온 뒤에 별문제 없이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대구시립희망원의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나온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향유의집에서 장애인지원주택으로 이전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이런 주장이 과장됐음을 보여준다.
사실은 도전적 행동이 심한 장애인을 시설로 보낼 때 더 큰 문제가 생기거나 아예 보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도전적 행동이 아주 심한 장애인은 오히려 시설에서 지내기가 더 어렵거나 시설이 아예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규칙과 통제 아래 여러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를 가중하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의 도전적 행동을 더욱 부추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설 운영자들은 시설 입소 계약을 할 때 도전적 행동 때문에 다른 거주인이나 직원에게 피해를 주면 퇴소시킬 수 있다는 조건을 두거나 입소를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237쪽)
장애인 가족들이 탈시설에 반대하지 않냐는 우려도 자주 나온다. 가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며 탈시설에 반대하는 가족들이 실제로 있고,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가족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시설이냐 탈시설이냐가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의 행복이며, 탈시설도 이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 탈시설이 가족에게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국가가 탈시설 이후 받을 수 있는 지원서비스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함께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화된 돌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시설정책의 주요 행위자였음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국가가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장애인과 그 가족 모두가 지역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국가,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주체로
한국의 장애인정책이 시설 중심으로 흘러간 데는 국가 책임이 크다. 시설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지원하되 책임지지 않는’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민간 조직인 시설이 사회복지서비스를 전달하고,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에서 국가의 역할은 지원과 관리·감독에 국한된다. 하지만 상속세·증여세 면세, 수익사업에 대한 법인세 감면, 시설 운영비·인건비 지원 등의 지원은 잘 작동하는 반면 관리·감독은 좀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그사이 많은 시설에서 학대와 폭력이 발생했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제라도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라고 요구하며, 탈시설을 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주거지원서비스와 주거 공간을 동시에 제공하는 장애인지원주택을 비롯한 공공임대주택 확충, 장애인들이 소득을 창출하면서 직장 내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자리 보장, 발달장애인의 필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활동지원서비스 개선 등등 주거, 소득, 활동지원 세 측면에서 필요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또한 이런 정책이 실현 가능한 것임을 예산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흔히 탈시설에 엄청난 돈이 든다고 생각하지만, 탈시설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금과 활동지원서비스에 드는 돈은 엄밀히 따지면 순수한 탈시설 예산이 아니다. 연금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정한 소득 기준에 못 미치는 모든 국민이 받는다는 점,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은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라 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회복지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탈시설을 하면 장애인거주시설에 투입하는 예산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한 연구는 현재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28,000여 명이 한 번에 탈시설할 경우 추가로 필요한 순증 예산을 약 3,746억 원으로 추정한다. 2024년 국가 예산 총지출 규모 657조 원의 0.06%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 예산을 정부가 세운 장애인탈시설 로드맵에 따라 20년간 나눠서 집행하기 때문에 예산 부담이 크지 않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렇게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탈시설이 단지 당위적인 주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임을 증명한다.
탈시설의 강력한 증거, 당사자의 목소리
이 책은 지역사회로 나온 뒤에야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탈시설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담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탈시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강력한 증거다.
박만순 씨 이야기는 ‘당사자가 싫다는데 억지로 내보낼 수는 없지 않냐’는 논리가 왜 잘못됐는지 보여준다. 49년을 인강원에서 보낸 그는 ‘자립’이라는 말만 나와도 화를 내며 ‘인강원에서 살겠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인강원에 다시 들어와요’라는 말에 손사레치며 ‘자립주택에 있는 내 방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시설에 남겠다는 말은 시설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고 단절돼왔다는 말, 그래서 시설 밖이 두렵다는 말이었다. 시설 밖을 경험할 기회를 얻은 뒤에야 박만순 씨는 자신이 정말 원하던 것, 시설에서 누릴 수 없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김미영(가명) 씨의 ‘뒷머리 뽕’은 ‘그래도 시설이 낫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다. 장애 때문에 오랜 시간 누워지내야 하는 그는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와 일상생활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직원 한 명이 여러 사람을 지원하는 시설에서 그런 지원은 불가능했다. 추운 날이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로 여행과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시설을 나온 뒤에야 김미영 씨는 자유롭게 다른 동네로 산책하러 다닐 수 있었고, 과거보다 사회 활동 시간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뒷머리 뽕’이 살아났다. “시설거주인 집단 속의 일부였던 김미영이 지역사회 시민이라는 지위를 취득하자 일어난 변화다.”(186쪽)
문석영 씨는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서 제대로 못 살면 어떡하냐’는 말에 대한 ‘비장애인도 다 잘 사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또한, 시설 밖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장애인이 시설에만 머무를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직접 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시설에서 나와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탈시설해서 못 살면 어떡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비장애인도 다 잘 사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역에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시설에서 나와 사는 것이 힘들고 지쳐도, 다시는 시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290쪽)
장애인, ‘실패할 권리’가 있는 동료시민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장애가 있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당신을 시설에 수용한다는 그동안의 말은 사실 배려가 아니라 배제”(294쪽)임을 폭로하는 고발장이자 “장애인에게도 위험과 실패를 허용하는 세계로 당신과 함께 건너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근사한 초대장”(장일호, 『슬픔의 방문』 저자)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려다가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껏 장애인의 시설수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리어 장애인에게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역설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장애인자립생활운동 당사자들이 실패할 권리 … 를 외친 바 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인정할 수 없는 가장 큰 근거로 종종 ‘자립 실패’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인 당사자가 보기에 실패할 가능성조차 없는 삶이란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를 뜻했다. 오직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실패 없는 삶이라면, 실패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도리어 자기결정권을 되찾는 것으로 이해했다.(275쪽)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이 “‘인간답게’ 실패하고 모험하며 살아갈 기회”(김지혜)를 누릴 때, 언제 시설로 보내질지 모르는 또 다른 존재들 또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파도는 모든 이를 밀어 올린다. 탈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장애인권운동의 파도는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노숙인, 아동 등 시설적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고양할 민주적 에너지의 원천이 돼주고 있다.(307쪽)
이렇게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시설 안팎 장애인의 이야기를 넘어 취약함이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너와 내가 각자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취약성을 환대하며 다양한 몸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가자고, 이 책은 우리를 조심스럽게 ‘시설 너머 세계’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