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질서를 향해서
복거일(시인)
I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시는 표제시다. 그 다음이 첫 시이고 그 다음이 마지막 시다. 김수려의 둘째 시집 《두드리고 있어라》에는 표제시가 없다. 시집 제목은 첫 시인 〈다녀온다 밤에〉의 뒷부분의 한 구절에서 뽑았다.
딱 딱 딱
아직은 머뭇거릴 힘 밖에 없다
두드리고 있어라
꺼질지도 모르니
밝아 올지도 모르니
그러니
똑 똑 똑
똑 또독 똑
당연히, 이 시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이 시에서 ‘두드리다’는 말은 ‘문을 두드리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즉 간절한 무엇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단서를 시는 내놓지 않는다. ‘다녀온다 밤에’라는 시의 제목도 앞쪽 구절들도 독자들이 시인의 뜻을 알아차릴 단서를 내놓지 않는다.
비가 내린다
똑 똑 똑 깊은 밤
낮게 두드린다 밤
언제일지 모를 나의 그 시간을
두드린다
똑 똑 똑
시의 첫 구절은 두드리는 주체가 비라고 밝힌다. 빗방울이 시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시간을 깨운다는 얘기다. 빗방울에 그런 역할을 부탁하는 마음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처지로 몰린 사람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어둠아 아프고 자라는 내 속 어둠아
딱 또닥 딱
어디로 날까 아래로? 아니면
위로?
아래로 꺼져서 더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처박힐까
위로? 조금이라도 위로?
마음에서 어둠이 자라난다는 시인의 독백은 독자의 마음에 아프게 닿을 수밖에 없다. 그 절실함에 “예술은 경험에 질서를 주는 일”이라는 얘기가 떠오른다. 실은 모든 지적 활동이-사람의 수준 높은 지적 활동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체의 모든 정보 처리들까지-경험에 질서를 부여한다. 위의 시구는 시인의 어둡고 괴로운 경험들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노력에서 나왔고 그 경험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 경험의 성격이 문제가 된다. 그런 경험이 보편적일수록, 즉 많은 사람들이 겪고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일수록,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가치가 높다고 여길 것이다. 이 점은 간절한 기다림을 드러낸 시 한 편을 감상함으로써 이내 이해될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를 절창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이육사가 담아낸 경험이 일본 식민지 시기의 2천만 조선인들의 경험을 대변했다는 사정이다. 자신의 죄수 번호 ‘264’를 자신의 호로 삼은 지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한 작품이기에 〈광야〉를 읽는 사람이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조선 민족을 넘어서 온 인류로 확대된다.
II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체로 내부지향적이다. 시인 자신의 마음 속을 살피는 시들이 비교적 많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섭을 다루거나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드러낸 작품들은 적은 편이다.
이런 사정은 시들이 사적(私的) 특질을 짙게 띠도록 만들고 공적(公的) 특질을 띠는 것을 막는다.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 성격을 띠므로, 예술 작품은 사적 독백의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시인 자신의 어두운 마음으로 끌린 눈길을 바깥으로 돌리면, 독자들이 이내 공감할 수 있고 독자 자신의 마음에 어떤 질서를 주는 작품이 나온다.
간밤에 폭발하였네
가을 겨울 긴 긴
기다림
두드림
뒤집어 폭발하였네
하얗게
소복한 기다림 북적댄 외로움
폭발하였네
기절하였네
두껍게도 무겁게도
이제 깨어나 그만
버렸네
배웅하였네
하얗게 독하게
이제 다시
살아야 하겠네
하얗게
〈벚꽃〉 전문
이 시가 들려주는 경험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꽃잎이 날리는 광경은, 특히 벚꽃이 바람에 날려 땅을 덮는 광경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연이 뜻밖의 힘을 얻어 독자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온다.
III
우리가 자주 하는 얘기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얘기다. 자연히, 우리는 사회적 맥락에서 씌어진 작품들에 끌린다.
앞 동네 하나
건너 마을에 하나
겸상 차리고
피어있다
웃고 있다
잘 산다고
저 길에 몇 개
이쪽 길섶에 두어 개
나 보러 오라
어스름 속에 걸리었다
가슴 켜고 있었다
등불로
〈접시꽃〉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칠십 년 전의 고향 모습을, 초가들 모인 산골짜기에서 어려운 삶을 꾸려가던 사람들을, 읍내 오일장에서 만나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던 시절을, 오래 전에 사라져서 다시 나올 수 없는 그 시공을, 떠올렸다. 그처럼 사람들과 꽃들에 공통된 질서를 이 시는 문득 불러낸다.
수가
엄마가 부산 카니
밥 차러 낫다
체겨 무그라
(1973년 08월 11일)
〈쪽지〉 전문
시인의 엄마가 남긴 쪽지를, 날짜만 덧붙여서, 그대로 실은 이 시는 독자들의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름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모녀 사이의 무척 사사로운 일이라서 ‘과연 이런 글을 시집에 올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시는 보기보다는 깊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자리잡았다.
미국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는 모든 생명체들이 사회적 존재라고 지적했다. 생식 자체가, 즉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낳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활동이라는 얘기다. 필자는 생식이, 유성생식이든 무성생식이든, 가장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쪽지〉라는 시가 감동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회적인 경험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