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관찰과 창의적 상상력 및 언어 감각으로 아름다운 서정적 수필로서의 예술성’을 형상화하는 이혜연 작가가《숨은 길》,《시간의 길이》에 이어 세 번째 수필집《어느 날, 그리고 문득》을 펴낸다. 5부의 챕터로 나누어진 이 책에는 ‘의미를 구성하고 창조한, 그래서 문학적 향취가 더욱 가득한’ 52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현실과 자신을 통찰하는 자세가 진지한 작가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 속에서도 독자를 긴장시키는 삶의 의미들을 캐내고, 그런 가운데 선명한 철학적 깊이를 드러낸다. 또한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이 세상을 정시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한다. 때로는 관념 세계에, 때로는 우리 사회를 관조하여 자신이 목소리를 내는 문학인, 바로 이혜연 작가이다.
가을 물처럼 소명(昭明)한 문장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이혜연의 작품들은 수필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어느 날, 그리고 문득〉에서 아버지가 ‘어느 날 문득 가셨다.’며 임종의 시간은 ‘어느 날’이었고 숨을 멈춘 건 ‘문득’이었다며 베케트의 작중 인물을 통해 ‘언제’라는 시간의 무의미를 천착한다. ‘다른 날과 똑같은 어느 날 태어났다, 어느 날 죽을 것이며 아무도 이곳에 온 일이 없었고 아무도 여기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를 소환해낸다.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허공에 떠 있던 구름 한 점. 다시 텅 빈 하늘. 지나간 자리의 자취 없음이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구름은 본디 실체가 없는 것 거기에서 이혜연 작가는 생사(生死)의 본질과 현상을 목도한다.
그의 수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오고 감이 없는데 계절은 순환(현상)하고, 끝내 무(無)가 되고(본질) 말 누군가의 오고 감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맹난자(수필가,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고문)
문적(文籍)에 오른 지 27년.
분주했는데, 제자리걸음이다.
생각이 많았는데, 쭉정이다.
움켜쥐었는데, 빈손이다.
머릿속에 공글리고 있을 때가 나았다.
발화(發話)하고 나면 늘 부끄럽다.
그래도,
다만 누군가에게 밑줄로 남는 문장 하나 있다면
행복이겠다.
-이혜연, 〈책을 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