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여덟 가지 주제를 다루며, 이는 일반적인 조직신학의 분류를 따르는 여타의 교리서들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책들은 대체로 명제적이고 선언적입니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이 명제를 답이라고 선언합니다. 정답을 제공하는 책인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은 기존의 교리서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독자들에게 정답보다는 질문과 고민을 던집니다. 이 가운데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삶’, ‘삶의 자리’입니다.
처음에는 저자가 조금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읽어가며 점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기독교가 이전보다는 삶과 실천, 세상으로 좀 더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눈엔 여전히 기복적 내세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저의 삶과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국가적 사태를 돌아볼 때, 이런 저자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회와 시대가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고 무기력했으니까요. 저 역시 질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이렇게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강조한 ‘삶’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읽었습니다.
저자가 강조한 ‘삶’에는, 답이 다양하다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았습니다. 각자의 삶의 정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껏 단 한 명도 동일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이 다양한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피조세계의 다양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 역시 다양성이 반영된 실체이며, 인간의 사유 세계가 지닌 다양성은 그보다 더 넓고 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그의 사랑과 지혜 역시 무한하십니다. 창조는 그 무한하신 사랑과 지혜의 발현이기에, 앞선 얘기들을 모두 고려할 때, 저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존재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제시한 ‘삶’과 ‘삶의 자리’를, 신앙하는 가운데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촉구이자, 겸손과 사랑에 대한 강한 권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이 책 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과 사랑이라 보고, 이것을 ‘성경의 원리’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는 이 책에서 4장이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4장을 중심으로 본다면 인간은(2장) 사랑해야 하는 존재이고, 죄는(3장)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나라는(5장) 사랑이 펼쳐지는 곳, 회개는(6장) 욕심과 미움에서 사랑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후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각 주제들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정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답을 찾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논하시는 그 신학의 원형(theologia arcetypa)에 비해 우리의 신학은 그저 모방(theologia ectypa)에 불과합니다. 둘 사이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시작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의 외침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