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생일에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은 아버지
현실 세계에서 민형은 괴롭힘을 당하는 코끼리 오타쿠 괴짜 소년이다. 중학생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경어체를 쓰고 자신이 설정한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반듯한 소년이기도 하다. 현실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게임 세상, 〈원더러즈 판타지〉 속에서는 백과사전에서 몬스터를 소환해 싸우는 용감한 박물학자 ‘엘 프사이’로 활약한다. 게임 속 세상을 더 진짜 세계처럼 받아들이는 민형에게는 자신의 기억 속엔 언제나 병상에 누워 있기만 했던 아버지도 고장 난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지오메트리 대시〉라는 게임의 스테이지 모양으로 생긴 심전도 그래프를 그리는 압전소자나, 요란하고 복잡한 골드버그 장치처럼. 민형의 열네 번째 생일날, 아버지는 결국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생일을 기념해 사 온 코끼리 케이크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상해서 무너져 내렸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그날 이후 마음에 고장이 났다.
‘에이전트 엘리펀트’와 ‘에이전트 조’의 비밀 퀘스트
어머니는 매일 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호흡기 질환이 있는 어머니가 숨이 막혀 죽지 않도록 민형은 새로운 퀘스트를 계획한다. 어머니를 밤에 오래 앉아 있게 하는 것. 민형이 아는 한 사람을 가장 오래 앉혀 놓을 수 있는 건 게임밖에 없다. 어머니도 〈원더러즈 판타지〉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한다면 어떨까? 민형은 〈원더러즈 판타지〉에 아버지의 캐릭터를 만들기로 한다. 아버지가 남긴 흔적들로 게임 속 집을 꾸며 놓으면, 그 안에서 어머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민형은 아버지가 남긴 흔적을 쫓아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파란 눈의 금발 머리를 한 대한민국 유일의 아파트 경비원 ‘조 아저씨’, 코드네임 ‘에이전트 조’와의 비밀 임무가 시작된다.
히든 퀘스트는 ‘솔직해지기 위한 용기’
매달 한 번씩 가는 상담은 민형에게 불편하고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상담사의 속이 뻔히 보이는 말들도, 그런 상담에 매달리는 어머니도. 하지만 ‘에이전트 엘리펀트’로서 아버지의 기록을 수집하던 민형은 그 여정 속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자신의 감정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말하기 싫은 이야기들을 자꾸만 캐묻는 상담사,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고장 나고 있는 어머니, 학교에서의 천적인 효종까지……. 그 속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솔직해지는 것. 어머니를 위해 시작한 특별 퀘스트는 마침내 민형의 세계에도 경험치를 남겨 줄 히든 퀘스트가 될 수 있을까?
서윤빈 작가는 이 소설을 이렇게 소개한다.
“추모하는 일은 과거와 같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가 디지털 매체에 저장되는 시대에 죽은 이가 남긴 흔적으로 그를 더 깊이 알게 되는 일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정보의 양은 늘어났지만 한편으로는 파편화되어 내밀한 이야기는 완전히 접근 불가능해져 버리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조각난 슬픔을 머리로 배우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