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압축한 합스부르크 천년사의 정수
10세기 알자스 지방에서 시작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300여 년이 지나 1273년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으로 등극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또 두 세기가 지난 1452년에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이후 영토 팽창을 거듭한 그들은 카를 5세, 막시밀리안 1세 등이 활약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럽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이후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왕위계승 전쟁, 근대화와 민족주의 분쟁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같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해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하고 만다.
독일 역사학자 안드레아 한저트는 이 책에서 출발부터 몰락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천년사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다사다난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와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요령 있게 간추렸다. 곳곳에 배치된 가계도와 지도, 부가 정보글은 당시 복잡한 인물 관계와 유럽의 세력구도, 낯선 개념 등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혼인 정책과 유전병이 전부일까?
세계사의 주역 합스부르크 가문의 진면모
합스부르크 가문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가장 먼저 그들이 다스린 광활한 영토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세력 확장의 비결이었던 혼인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에스파냐, 헝가리 등의 왕위계승권을 혼인을 통해 획득하며 영토를 넓힌 것이 잘 알려져 있지만, 작은 귀족 가문에서 독일 왕을 거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혼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어렵게 획득한 왕좌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는데, 이는 유전병과 후사 단절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면모는 그들 역사의 일부일 뿐이다. 이 책은 유럽을 움직이는 주역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계사에 남긴 굵직한 발자취를 잘 보여준다. 종교개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로마 가톨릭과 반(反)종교개혁을 수호하는 핵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자신들의 통치 지역에서 개신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음을 고려할 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택이 개신교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평한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이에 맞서 동맹국들과 함께 나폴레옹을 무너뜨렸으며, 향후 100여 년간 유럽의 질서를 확정한 빈 체제를 주도했다. 그러나 슬라브인을 제국 내부로 통합하려다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례없는 대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전쟁을 결심한 것이 빈 체제하의 세력 균형이 여전히 작동한다고 여겨, 단기간에 국지전으로 끝나리라고 오판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독특한 지배구조를 이해하면 유럽의 오늘이 보인다
유럽의 중세사와 근대사를 읽다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점들 때문에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배구조다. 군주 한 사람이 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나라를 다스린 일이 빈번했다. 그 중심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있었다. 이 책은 이 낯설고 복잡한 지배구조의 원리에 대해, 여러 나라가 같은 사람을 군주로 삼지만 제각기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체제, 즉 ‘동군연합(同君聯合)’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은 이런 지배구조 아래 신성로마제국 시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뿐만 아니라 헝가리,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 남이탈리아의 여러 왕국 등 다양한 국가와 지방을 다스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세운 이후에도 그 안에는 여러 국가가 속해 있었고, 헝가리인·체코인·폴란드인·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우크라이나인·루마니아인·슬로바키아인·슬로베니아인·이탈리아인 등 많은 민족이 섞여 살았다. 점차 민족 분쟁이 터져 나오고 그것이 절정에 달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패배함에 따라 이들은 제각기 독립하면서 나라를 세웠다. 이 책은 복잡하게 얽힌 중·동부 유럽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리고 유럽의 통합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