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은 아직
거울 속만큼만 보인다
돌아보지 않고 쌓은 큰 창고
노을 앞에서도 눈 감겨져 있는 그녀
바람 없는 어느 날
시간이 정지된 듯 깊은 눈물은
접어버리지 못하고 맺힌 날들을
흔적 없이 흩어버린다
이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색 버린 강물에 맡겨본다
티끌보다 작은 내가 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모서리 없는 둥근 만남으로
미리 종이에 적어본다
-「둥근 만남」 전문
시인이 만나는 모든 사물들이나 일상은 둥근 모습을 지닌다. 모난 것들도 둥글게 빚어내는 마법을 지녔다. 서묘연 시인의 자기성찰이 담긴 시작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거울 속만큼만 보인다. 돌아보지 않고 쌓아놓은 거울 속 사물과 사연들은 거울 속 내 눈은 노을 앞에서도 감겨져 있다. 그래서 바람 없는 날 시간이 정지된 듯 깊이 밴 눈물은 접어버리지 못하고 맺힌 날들을 흔적없이 흩어 버린다. 그리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색을 버린 강물에 맡겨본다. 색을 버린 강물은 어떠한 의미를 담아내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세상을 보는 눈이 성숙되고 정화된 모습임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렇게 의미의 태를 벗어놓고 나면 나는 티끌보다 작은 것임을 느끼고 사물이나 사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볼 수 있어야 둥근 만남이 이뤄질 수 있다. 그 다짐으로 시를 적는다는 의미다.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아젠다라고 보면 된다.
이젠 길섶에 앉은 민들레 노란 향기
그릇에 담고 싶어 물음표를 단다.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초록 잎새 한 가닥 내어 본다
-「종이비행기」 후반부
서묘연 시인의 시작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의 뒷부분이다. 스스로를 길섶에 나앉은 민들레로 비유한다. 노란 향기를 자신의 그릇 속에 담고 싶어 시인은 물음표를 단다. 시인은 끊임없이 물음표를 다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시잉는 그래야만 한다는 듯히 그런 태도를 지니고 쓴 시는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초록 잎새 한 가닥 같은 시를 내어 보낸다고 겸손해 한다. 이런 겸손함이 발견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서묘연 시인의 작품 세계인 것이다.
〈추천사〉
서묘연 시인의 온기 품은 만남은 비단 사람들과의 만남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가 만나는 자연과의 관계에 서도 부드러움과 온기를 엮어낸다. 시인이 가진 본연의 정서가 그것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봄비 내리는 날
오래 기다렸던 나뭇가지들
연두색 얼굴이 밝다
먼지 쌓인 찻길
골목 안 작은 돌멩이
소리 없이 씻어주며 봄을 알린다
겨우살이에 지친 나무들
봄이 온다고
다시 일어서라며
작은 소리로 흔들어 깨운다
봄비 내리는 날
겨울 떠나는 소리
수평선 너머 그곳엔
너무 멀어 닿지 않을지 모른다
-「봄비」 전문
봄비가 내리는 날은 봄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나뭇가지들도 밝은 연두색을 띠고 봄비를 맞이한다. 아니 봄비가 나뭇가지를 씻겨 준다. 그 일은 먼지 쌓인 찻길이나 골목길 돌맹이도 마찬가지다. 봄비가 씻어주는 것이다.
겨우살이에 지친 나무들에게 봄이 오고 있다고 다시 일어서라며 작은 소리로 흔들어 깨운다. 봄비가 내리는 날은 겨울이 떠나는 소리가 난다. 봄이 오고 있는 수평선 너머 그곳에는 너무 멀어 닿지는 않지만 봄비가 봄을 가져다주기에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봄비는 봄을 가져다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 시의 느낌도 밝고 따뜻하다. 서묘연 시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서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어떤 사물이든 시인의 사고에 젖었다 나오면 온유해지는 것일까. 시를 읽는 독자들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구름 따라」,「빈집」,「오래된 책」,「겨울나무」,「나팔꽃 사유」,「바다와 함께」,「돌탑」,「작은 물고기」,「책갈피」,「가로등」,「돌감나무」에서 사물의 본성을 둥글게 뽑아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들은 서묘연 시인에게 평법한 모습으로 다가 오지만 읽혀지는 것은 비범함이다. 사물에 내재된 부드러움과 온기를 찾아내는 일이 시인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