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 세상 건너는 사람꽃의 시
양광모의 20번째 시집 『꽃멍』에는 지금껏 그가 써온 시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재(題材)들이 줄지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집중적인 의미를 담은 시들의 군집(群集)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시인의 시가 가진 장점 중 하나는, 여하한 경우에라도 시가 우리 삶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기실 이러한 측면은 세월의 흐름과 우리 삶의 현재적 국면을 함께 조명하는 ‘일상시’나 ‘생활시’와 같은 범주에 있어서는 매우 긴요한 일이다. 시에서 삶의 진면목을 만나는 지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월 1일의 기도」에서 한해의 경점(更點)을 넘기거나, 「겨울날의 묵상」에서 계절의 변환을 목격하는 것이 소거와 재생의 새 차원을 설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사정에 당착한 시인은 「사람꽃」에서 ‘사람’을 ‘사람꽃’이라 객관화하여, 그에 대한 수납과 감당의 정황을 묘사한다.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멍하니 물을 바라본다.
살아가는 일에 멍이 든 영혼일수록
골똘한 법인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멍하니 별을 바라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푸른 멍
한두 개쯤 몸에 지니기 마련인데
아름다운 사람아,
마음에 그늘지는 날에는
꽃멍을 하자, 새벽부터 밤까지
물끄러미 초롱한 눈으로 꽃멍을 하자
- 「꽃멍」 전문
복잡한 생각 없이 불만 바라보면 ‘불멍’이라 하고, 물만 바라보면 ‘물멍’이라 한다. 이때의‘멍’은 ‘멍하니’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인용된 시에서 시인은 또 다른 ‘멍’의 개념을 차용하여, 중의법적 발화 구조를 형성한다. ‘살아가는 일에 멍이 든 영혼’이라 쓴 것이다. 하늘이나 별을 바라보는 ‘멍’과, 살다 보면 누구나 한두 개 몸에 지니기 마련인 ‘멍’을 동음이의어로 병렬해 놓은 터이다. 뒤이은 시인의 권유는 ‘마음에 그늘지는 날’에 ‘꽃멍’을 하자는 데 이른다. 이때의 꽃멍은 사람마다 몰래 간직한 멍든 가슴의 상흔(傷痕)을 ‘물끄러미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자는 말이다. 깊은 아픔의 소재와 이를 넘어설 방식의 청유를 이보다 더 아름답게 내놓기는 어려운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