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크게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테마와 ‘예술은 현실 속에 내재한 사상과 이념, 즉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즉 1부가 과거지향적이라면, 2부는 현재지향적이다. 예술은 과거와 현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미술을 통시적으로 또 공시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각 장이 설파하는 내용 역시 버릴 것이 없는 중요한 테마이다.
1부에서는 현재 잊혀져가는 초상화 전통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불교미술이 어떻게 창조적으로 현대화되어야 하는지 실례를 보여주기도 하며, 민화라는 한국의 아름다운 색채미술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지 고민한다. 특히 민화의 경우 그 용어의 재정립이 필요함을 누차 강조한다. 한편 동상의 전통을 살핌에 있어 김복진과 김영원에 주목한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건립한 모든 동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하며,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수준 미달의 조형물과 작품성이 없는 동상 문화에 유감을 표하기도 한다. 특히 공공미술이라는 미명 아래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경각심을 표하며 예술성과 공공성을 기본으로 하는 미술작품의 설치의 절실함을 주장한다.
2부에서는 소위 사회의식이 어떻게 미술에 반영되어왔는지 반추한다. 이를테면 4.19혁명의식이 서울대 미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본다. 혁명기념 조형물을 건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소극적 대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가 10년 후 현실 동인을 결성하며 새로운 미술운동의 지평을 연다. 이후 이른바 민중예술의 본산이 된 것은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민중미술 운동이었으며, 판화운동과 결합되기도 하고 미술가들이 인권 투쟁 현장으로 스스로 투입되어 활동하며 발전하는 세계 유례없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현실 동인의 발전된 형태인 "현실과 발언"이 창립되며 10년간 활발한 활동을 선보였다. 군부독재 아래 미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80년대 민족미술운동과 현실주의 미술운동의 선구적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평론가와 작가가 결합된 결합체로서 창작과 비평에서 탁월한 위치를 선점하였고, 한국미술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80년에 개최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의 전시불가 사태는 촛불전시라는 초유의 사건을 낳았는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실감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인 윤범모가 현실과 발언의 창립멤버였기 때문이다.
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를 읽을 때 독자들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독자들은 80년대의 한 술집에서 시국과 미술평론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자신을, 새로 열릴 행복에 관한 전시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는 자신을, 현실과 발언 망년회에서 노래 한 곡조를 뽑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독자 스스로가 현실과 발언의 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그 시대를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체적 인물, 구체적 장소, 구체적 발언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이 파트는 너무 생생하여 그 시절로 빨려들어가는 듯하다. 비록 현실과 발언은 10년만에 해체되었으나 30주년, 40주년 회고 전시를 통해 후배 미술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음을 이 책이 회고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민중 미술을 제외하고도 항일미술과 친일미술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하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 위안부 문제를 다룬 미술 운동 등 다양한 시대적 문제에 동참한 미술운동을 다루고 있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고자 한 예술가들의 예술 세계를 통해 진정한 예술, 특히 미술의 의미를 되새기는 책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시대는 각각의 문제를 담고 있다. 예술가의 사명은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예언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미술사에서 시대정신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지 논증하고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