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종이로 만들어진 돈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물질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기 때문에 유통되는 것도 아니다. 물건과 서비스의 대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진다.
- 가계는 노동을 통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 범위 내에서 부채 조달이 가능하다. 기업은 비즈니스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서 임금을 지급하고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능력 범위까지 부채를 조달할 수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경제 성장이라는 파이를 키우면서 그 구성원들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는 능력 범위 내에서 부채를 조달할 수 있다.
- 국가가 신용(부채)을 남발하면 인플레이션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국가의 공급 능력이 부족하고 생산성이 낮은 경우에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전자는 수요 과잉에 의해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이고 후자는 공급 부족에 의해 초래되는 인플레이션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경제 내의 노동생산성과 자본생산성을 높임으로써 공급 능력을 확충하는 것이다. 국가가 국채 발행과 재정정책을 통해 민간 부문의 자산 축적을 유도하고 생산성과 공급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재정정책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 재정정책은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재정지출을 집행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면 민간 투자가 위축되고, 자칫하면 재정기율이 무너져 통화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돈만 대고 민간 부문이 그것을 주도적으로 집행하는 방식으로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 물가안정을 최상위 목표로 하는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면서 재정지출의 견제 장치를 만드는 것도 재정지출의 부작용을 막는 유효한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의지다.
- 버냉키의 21세기 통화정책, 즉 양적완화 정책은 국가의 보증이나 국가 부채를 담보로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중앙은행의 의지를 보여주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양적완화 정책이 결코 공짜로 돈을 퍼주는 정책은 아니지만 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이 지속되면 실물자산의 상대적인 기대 수익률이 높아져 기업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기적 버블이 발생할 수 있다. 통화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부동산에 대한 영구 양도세 같은 과세 정책, 즉 넓은 의미의 재정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2)
- 글로벌 무역수지의 합이 0인 것처럼, 어느 나라의 통화 단위로 평가한 금융자산과 금융부채의 합은 반드시 0이다. 즉, 누군가의 금융자산은 다른 누군가의 금융부채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지 금융자산(돈)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인센티브 장치를 활용해서 경제 내에 실물자산을 축적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다.
-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진정한 국부는 무역을 통해 축적된 귀금속이 아니고,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금융순자산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금융자산이 될 정부의 금융부채를 활용해서 민간 부문의 생산 능력을 높이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 이 책에 의하면 가계와 기업, 정부, 해외 부문이 가진 금융순자산의 합계는 0이다. 그리고 2023년 기준 한국 정부의 금융순자산은 GDP의 41%다. 미국의 -113%, 일본의 -94%는 물론 대만의 1%보다도 크게 높다. 한 마디로 한국 정부는 부자다. 그런데, 정부는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놀랍게도 특별한 용도가 없다. 정부의 금융순자산은 다른 부문의 금융순부채와 일치한다. 가계와 기업 부채 증가의 근본 원인은 정부의 순자산 증가에서 찾아야 하며,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도 정부의 맹목적인 금융순자산 축적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3)
- 금본위제도나 고정환율제도는 통화를 금이나 달러화로 언제든지 바꿔줄 수 있다는 국가적인 약속이다. 하지만 변동환율제도 하에서 국가는 자국의 통화를 달러화로 바꿔줄 의무가 없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과도한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민간 금융회사의 외화자산과 외화부채 사이에 미스매칭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거나, 금융회사가 외화부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면 그에 비례해 외화유동성도 충분히 보유하도록 규제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4)
- 비트코인은 사용가치가 없고 단지 교환가치만을 가지는 자산이다. 금이나 토지도 비슷하다. 자산 보유자는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구매자를 찾아야 하는데, 거래가 성립하기 전까지 새로운 구매자는 아무런 의무가 없다. 반면, 오늘날 돈은 일종의 차용증이다. 누군가의 자산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부채다. 채무자는 이자와 배당을 포함해 일정한 부채 상환의 의무가 있다.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 빌린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즉 부가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돈을 빌린 가계나 기업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파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산의 거래와 돈의 유통은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부가가치의 창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후자는 지대한 영향을 준다.
- 국가는 차용증을 남발하더라도 파산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부채는 양면성을 가진다. 한편으로는 도덕적 해이와 비효율을 유발하거나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해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재정지출과 국채 발행과 조세정책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장은 물론 미래의 세금 부담에도 그다지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