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갯속 내 가야 할 길
철학자 쇼펜 하우어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고독한 모습일 때 본래 지닌 것이 드러난다.”고 했다. 자기만의 고독을 마주할 때야 비로소 나란 한 인간과 맞닥뜨린다. 이런 고독의 시간에 가만 이름을 붙여 희망의 빛을 살려낸 시가 세상에 나왔다.
‘삶의 여울목을 건너기에 / 무척 힘들었던 때 / 밤마다 일기장을 펼쳐 놓고 / 짙은 안갯속 / 내 가야 할 길을 / 열심히 찾아다녔다.(「창조」 중에서)’는 신숙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남다른 불행을 남다른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인의 단상들은 깊되 무겁지 않고, 밝되 가볍지 않다. 시마다 관조적인 정갈함을 잘 보여주는 이번 시집에는 총 네 가지 주제(진심, 희망, 위안, 확신)가 들어 있다.
주제마다 소박한 삶의 길 사이사이 만나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 거기서 스스로 건네는 성찰과 다짐, 그럼에도 밝음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 등이 따스한 시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시 속 표현처럼 전체 시들은 짙은 안갯속 내 가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방법
첫 장인 ‘진심’에서는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어미의 아픔이 여전히 가슴을 에인다.
‘10년 전 그날 / 내 몸에서 / 힘 있는 물질들이 / 모두 빠져나가고 / 희로애락과 / 진선미의 배열을 / 새로이 해야 했던 날.’(「넋」 중에서)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큰 아픔도 긴 세월을 지나 어느덧 담담함과 단단함이 되어 있다.
‘내 사랑 대부분을 가지고 / 하늘로 떠나면서도 / 사랑의 방법을 내게 남겨놓은 / 뜻 모를 너의 소행 덕분에 / 엄만 다른 이들을 돌보며 / 바삐 지내고 있나 보다.’(「사랑의 방법」 중에서)
마침내 인생길에서 어떤 아픔을 만난다면 짓궂은 농담인 양 받아들이며 대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인생길에서 / 쓴 것이 다하면 / 단 것이 온다는데 / 쓴맛은 / 얼마나 더 봐야 하고 / 단맛은 / 언제나 볼 수 있나요?’(「쓴맛과 단맛」 중에서)
이대로 멈출 수는 없잖아
두 번째 장 ‘희망’에서는 엄정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시 곳곳에 승부, 성장, 성취, 욕망, 분별 같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고뇌가 들어 있다. 우리네 삶이 ‘찰나에 뺏고 빼앗기는’ 한판 승부 같다고 하며 그 사실이 서글프다고도 토로한다.(「한판 승부」 중에서)
다만 뺏고 빼앗기는 한판 승부 속에서도 이내 시인으로 돌아와 관조한다. ‘혼자서 / 은밀히 노력하고 / 성과가 서서히 드러나는 / 삶의 모습을 / 나는 / 좋아하나 보다.’(「농구 경기」 중에서)
또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사투와 그 실패에 대한 난감함을 담담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내 사랑하는 아이를 / 죽음의 골짜기로 보낸 / 죄인으로 살아 온 내가’ ‘뜻있는 일을 위해 / 뛰어야 할 영역이 어디인가 / 밤이 오면 / 무얼 위해 써 버린 하루였나’(「소명」 중에서)
그럼에도 다시 한번 ‘걱정거리를 낱낱이 모아 / 맞붙어 격투라도 해 볼까브다 / 이대로 / 멈출 순 없잖아.’(「승리」 중에서)라고 기어코 털고 일어난다.
인생에서 좋은 것만을 택하려네
다음 장 ‘위안’에서는 삶 곳곳에 여유와 사랑을 만날 수 있다.
‘내 인생 과업은 / 생각나기로 귀결됩니다.’(「인생 과업」 중에서) 하며 시인의 본분을 되새기는가 하면, ‘나는 / 좋은 것만을 / 내 것으로 택하려네’(「마음의 여유」 중에서)라고 말하며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마음을 다잡는다.
이어 ‘눈 코 입 손 발 / 제각각 아직 열심히건만 / 생각 하나만 / 헛길을 꿈꾸기 일쑤이니 / ‘정신을 차리자구’ / 겸연쩍게 웃어 보네.’(「노년」 중에서)에서는 나이 듦에 대한 진솔한 농담이 사랑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거북 걸음처럼 가리라
마지막 장 ‘확신’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경의를 숙연히 노래한다.
‘왜 우리는 / 이리도 힘든 길을 통해야 했나 / 순순히 받아야 할 / 평안이여’(「힘든 길」 중에서) 하며 내맡김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때로는 ‘확신이란 / 두 글자가 / 뜨거운 물줄기 되어 / 뺨을 타고 흐른다.’(「확신」 중에서)
궁극적으로 시인의 시선은 ‘거북 걸음처럼 / 작은 습관으로 이루어져 / 거북 생명처럼 / 항구하게 지속되는 게 / 기도의 본뜻’(「기도의 본뜻」 중에서)인 것 같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 깨달음은 마침내 삶 속의 새로운 희망으로 향한다.
‘삶을 / 유지하는 것 / 가끔씩 오르는 뒷산에서도 / 한 줌 흙속에 들어 있을 / 기적 같은 생명력에 / 귀 기울여 본다네.’(「생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