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이유
영원에의 약속은 어설픈 것이라
어쩔 수 없다 치자.
약속, 소유, 집착과 젊음, 그밖에 현상들
모두가 가벼워서
언젠가 훅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을…
그래도 시를 쓰는 것은
진실과 본질을 따라가보기 위함이다.
눈물도 잘 여물면 꽃 별 노래가 되게 하는
시의 프리즘, 그 빛의 투과로 나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시는
사랑이며 슬픔이요
아픔이며 환희이기도 한 것.
일상을 꿰매는 따스한 시어의 바느질
곽혜란 시의 미학
민용태(고려대 명예교수, 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
곽혜란 시인은 그 고운 미모와는 달리 착실한 일상을 꾸려가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시간을 쪼개며 하루 종일 여기 저기 차를 몰고 다니다 더러 고장이 나기도 한다. 정말 짜증나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의외로 차분하다:
자동차 시동이 걸렸다 안 걸렸다
오늘은 아예 걸리지 않는다
배터리를 교환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잘 나간다
차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사람도 더 이상 시동이 걸리지 않을 때
교환할 수 있는 배터리가 있다면
세상의 슬픔도 눈물도 반으로 줄 텐데
나는 혈육과 영영 이별을 해본 사람인데도
일상의 위대함을 자주 잊고 산다
매일 새날이 시작되고 새 삶을 살아가는
아침의 기적 앞에 지금 막 힘찬 시동을 건다
-「다시 시동이 걸리다」 전문
곽 시인에게 일상은 늘 이렇게 “매일 새날이 시작되고 새 삶을 살아가는 아침의 기적” 같은 것이다. 늘 다시 “힘찬 시동을 거는” 아무렇지도 않은 직장인, 생활인. 그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기적”임을 안다. 짧은 시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에게 어깨 두드리며 보여주고 싶은 우리 모습이다.
곽혜란 시인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시인은 나와 같은 시민들을 자주 만난다. 얼굴이 비슷하거나 목소리가 비슷하거나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들. 그래서 곽 시인은 인사 대신 인연을 신기해한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어쩌면 저와 얼굴이 똑같아요?” 하기는 민망스럽다. 그러나 시인은 얼굴이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은, 그러나 너와 다를 너와 나를 눈여겨본다. 신기하다. 신기함은 시다.
곽 시인은 소리가 비슷한 말에 민감하다. 소리가 비슷하면 뜻이 비슷하리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그러나 비슷한 소리가 뜻이 다를 때 우리는 놀란다. 우리는 두 번 이상하다. 같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전연 다른 사람일 때 우리가 섭섭하리만큼 낯설 듯이. 이런 아이러니 기법은 오늘 시의 강점이다.
곽 시인이, “일탈이 고맙다/일상이 반갑다”라고 할 때 우리는 이상하다. 일상 생활은 날마다 틀에 박힌 루틴(routine)이지 “일탈”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어법에 가까운 “일상”과 “일탈”의 반복은 아이러니하면서 눈에 뜨이지 않은 적응을 위한 안간힘이 느껴진다. 반복이어서 리듬을 도우면서 동시에 뉘앙스를 달리하는 의미의 무늬와 그림자가 맛깔지다.
“다시라는 말이 있어/정말 다행이다”는 시구의 “다”의 반복도 평안한 느낌을 준다. 시행의 리듬이 원래의 뜻을 반추한다. 곽 시인의 시어에는 가장 평범한 반복이어도 속마음이 드러난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 속을
나는 언제쯤 한 번에 척 가늠할까
-「간장」 중에서
이런 시구에서 “속내”와 “속”, “척”의 “ㄱ”받침이 이상하리만큼 안타까운 속마음을 메아리친다. 자유시라고 해도 이런 리듬의 소리 상징은 시의 맛과 뜻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누군가 시인은 바보 같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다
떼인 돈보다 잊어버린 시구를 아까워하고
시 한 편과 마주앉아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요즘 세상과는 동떨어진 문사들
천사가 되었다가 여우가 되었다가
아기가 되어 꿈망울을 먹고 사는 바보
꽃과 시와 별똥별을 한 수레 끌고
고운 마음씨 순정을 바칠 줄 아는
정말 바보
-「시인」 중에서
“떼인 돈보다 잊어버린 시구를 아까워하는” 시인은 참 많다. 돈이나 물건, 실용주의보다는 꿈을 먹고 사는, “아기가 되어 꿈망울을 먹고 사는 바보/꽃과 시와 별똥별을 한 수레 끌고” 가는 시인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난다. 이런 “바람” 같고 “바보”스러운 사람을 노래하듯 칭송하는 시는 동음반복이 최대의 효과를 낸다:
바람둥이라고 해도
바보라고 해도
시가 좋아 시로 살아가는 사람들
시인은 시인할 밖에
-「시인」 중에서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시인은 어머니의 말을 시적으로 잘 알아듣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어(메타포)는 사실을 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했다. 곽 시인은 어머니의 말을 곧잘 알아듣는다:
비웠다 내려놓았다 그 말도
여전히 아프고 무겁다는 말
괜찮아 걱정 마 했던 그 말도
아직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말
거칠게 뿌리치며 밀어내는 것은
나 힘들어요 나 좀 붙잡아줘요 하는
참으로 여린 절규
-「이상한 반어법」 중에서
시인은 항상 작고 여리고 가여운 것 쪽이다. 구태여 좌파 우파를 말해서는 안 된다. 세르반테스는 “시란 나이 어린 여리고 가녀린 소녀”라고 했다. 소녀 아닌 어머니가 어디 있으랴? 아이 아닌 어른이 어디 있으랴? 사람은 다 속으로 여리고 아프다. 더구나 나이든 어머니는 더 어리다. 자식 걱정할까봐 늘 “괜찮아”하는 말도 곽 시인처럼 잘 이해주길 바란다. 바라는 건 아니지만…
네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온다. 그 꿈은 우리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토끼풀”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있어왔다. 더러는 게을러서, 더러는 나이 들어서 지나치곤 하지만 곽 시인은 그 행운이 “하얀 꽃들을 낳아 돌보며/당당하게 살아가는 풀들이 이루어 놓은/소담한 진실”로 자기 속에 살아있는 삶의 기적이었음을 깨닫는다:
행운이라는 말에 눈이 멀어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더 소중한 것들을 다 지나쳐왔음을 깨닫습니다
하얀 꽃들을 낳아 돌보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풀들이 이루어 놓은
소담한 진실이 거기 있었는데
대대한 것만 쫓느라
소소한 행복을 놓치고 말았네요
세상에는 행운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다는 걸
-「토끼풀」 중에서
곽혜란 시인에 있어서 삶과 일상은 그대로 기적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순간 기적의 발견이다. 사람들은 “대대한 것만 쫓느라/소소한 행복을”이 진짜 행복임을 놓치고 산다. 들숨 날숨 사이, 사랑하고 애 낳고 기르고 하는 일생이 진짜 살아있음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큰 것은 작고 “소소한” 것에 있다. “대대한” 대통령에게보다는 작은 나에게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삶 속에서 날마다 조금씩 깨달아간다:
내가 귀함을 받고 싶거든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예의를 갖추라
사랑이 있어 사람이고
사람이라서 사랑이다
-「세상에 대한 예의」 중에서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즉 “仁”이었다. “人”은 “仁(사랑)”이다. 곽 시인의 말대로라면, “사랑이 있어 사람이고/사람이라서 사랑이다”. 어렸을 때부터 올곧은 유교의 집안에서 자란 곽혜란 시인의 미덕은 고운 말씨와 예절바름이다. 이 시는 곽 시인의 생각이면서 마치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를 읽는 느낌이다. 곽 시인은 우리 모두처럼 유교인이면서 불교인이다:
하늘과 강물
바람과 나무들이
몸을 섞어
빚어놓은
황홀의 찰나
내가 있으되 내가 없고
-「연꽃」 중에서
불교 선시(禪詩)의 한 구절 같은 시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활홀의 찰나/내가 있으되 내가 없고”는 깨달음의 소리이다. “무어(無我)”의 경지를 느껴야 우주 안의 참 나의 빈 모습을 안다. 곽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일본 바쇼(芭蕉)의 하이꾸(徘句)에서나 느끼는 선미(禪味)가 느껴진다:
사방은 온통
스카프 한 겹 정도
엷은 저녁 비 6시 30분
얄팍한 속셈처럼
가늘게 내리는 봄비
그 속을 걷는 우산 하나
빗방울 수만큼 많은 할 얘기들…
-「봄비는 스카프 한 겹 정도」 중에서
“얄팍한 속셈”처럼 세속과 자연, 가늘게 내리는 봄비가 밉지 않다. “그 속을 걷는 우산 하나”가 도시에 사는 우리 마음속에 서 있다.
도시 삶에 시달리다 보면 피로 속에서 문득 내가 어린 한 살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안간힘이 필요할 때
어디 한번 해보자고 다짐할 때
두 주먹을 쥐어본다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여리디 여린 생명으로
미지의 세상에 내던져질 때
첫울음 터뜨리며 온 힘으로 쥐었던
조그맣고 장한 주먹
-「주먹」 전문
그래서 “첫울음”의 “조그맣고 장한 주먹”의 힘으로 지금까지 모질게 버텨왔구나 생각이 든다. 첫울음이 있으면 “종착역”도 있는 법. 다음 시를 보자:
내 인생도 눈 깜짝할 새에
막다른 종착역에 덜렁 혼자 내려
다음 생으로 가는 열차로 환승하겠지
길을 떠나는 것은 일부를 놓아야 하는 것
낯선 길 위의 내 그림자를 돌아보는 것
-「SRT를 탔다」 중에서
스페인 말에 “길을 떠나는 것은 조금 죽는 것(Viajar es morir un poco)”이라는 말이 있다. “일부를 놓아야 하는 것”은 겸손이 있어서 더 좋다. “낯선 길 위의 내 그림자를 돌아보는” 여유는 향기롭다. 무슨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랴. 다음 시는 마지막 길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세상 그 무엇을 휘어잡았을지라도
그 손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빈손에 가득한 진리
세상을 떠도는 바람처럼
모든 것을 품고 아무것도 거두지 않는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중에서
참한 불자의 모습이 보인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길, 뭐 가지고 갈 게 또 있으랴. 곽 시인에게 유교인의 모습과 불자의 모습이 함께 보이는 것은 이상할 거 없다.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치원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종교정신(國有玄妙之道)”이 있으니 “풍류도(風流道)라 하신다. 풍류도는 유불선(儒佛仙)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는 한국의 종교 정신이 풍류도임을 역설한다. 곽혜란 시인은 나와 함께 김삿갓이 말년 10여년을 머물었던 화순 적벽에서 “풍류도 선언”을 한 풍류인이다. 다음 시를 보자:
바위와 바람이 같은 말로 통해서
화순은 바윗돌 하나도
부처가 되고
바윗돌 하나 갖고도
천년은 너끈히 받치고 사는 곳
하릴없는 도깨비도 마음씨 좋은 곳
수백 년씩 살고 있는 은행나무 은행나무…
둥치 보듬어 안고
승천을 꿈꾸는 화순
하늘의 친척 땅의 친구
나무와 바람과 바윗돌
한 식구 같은 곳
-「김삿갓 풍류 화순(和順)」 중에서
천불천탑(千佛千塔)이 있는 운주사에는 불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맨 돌들이 부처님이다. 화순에는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도 있다. 거기에서 은행나무를 닮아 천년 무병장수하자는 “풍류도 선언”을 한다. 예술과 시를 위하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는 풍류를 즐기며 오래 오래 살자는 것. “道”는 자연을 본받는 것(道法自然). 곽 시인의 다음 시를 보자:
작은 새 한 마리 날아와
나뭇가지 위에 앉자
나무는 팔뚝에 힘을 주어 새를 받쳐준다
새가 조그마한 입으로 노래를 부르자
나무는 손을 흔들며 화답해준다
-「나무와 새」 중에서
새와 나무, 나무의 팔뚝. 새의 노래에 화답하는 잎가지 손바닥들. 이것이 자연과 우주와의 합일이고 화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곽혜란의 시의 장점은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는 혜안(慧眼)에 있다. 일상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친숙해서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는 생각을 넘어 곽 시인은 가족이 기적임을 느낀다. 그녀의 어린 시절 가족 모습을 보자:
온 마을 불빛들 별로 할 일 없이
졸린 눈 비비며 서있다
밥숟가락 입에 물고
자울자울 조는 막냇동생
엄마가 흔들어 깨우시며
아가, 어서 밥 먹고 자야지 하면
별님 오시기도 전에
막냇동생은 이미 오밤중
어머니는 자꾸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오남매 양말을 꿰매신다
-「저녁 고향」 중에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어린 시절의 집안 풍경이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어느 것 하나 사람 아닌 게 없다: “온 마을 불빛들 별로 할 일 없이/졸린 눈 비비며 서있다”. 온 식구가 졸음에 겨워 저녁 시간을 보낸다. 그 중에도 “자꾸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오남매 양말”과 꿈을 꿰매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세속에 사시는 성녀의 몸짓이다. 그런 정과 정성이 가족의 힘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별이 된다. 생각해보면 우주 안의 각각의 존재들이 “한 이불 속에” 살처럼 하나 되어 산다. 가족은 기적이다:
가족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
사랑이 사람과
소리의 형제이듯
글자도 소리도 어깨동무
가족은 기적이다
이해하고 감싸주고
다독이면 다 잘 될 거야
때로는 참아주고
때로는 기다려주면
더 예쁜 꽃으로
더 영롱한 보석으로
다 잘되어 갈 거야
더 영글어 갈 거야
낯선 별과 인연이 한 이불 덮고 사는
가족은 기적이다
-「가족은 기적이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