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이 죽은 자가 산 자를 깨운다 했듯이
2025년 격변기를 살아야 하는 우리를 깨우는
박선영은 80년대를 살아낸 우리 모두의 이름이다.
이 책은 한 소녀의 성장기이며, 한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는 현대사이자
지식인의 책임과 고뇌를 담담하게 그려낸 분투기이자.
한 가족의 민주화운동 투쟁사이다.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독재정권 시절, 광주의 한 소녀가 대학생이 되었다. 캠퍼스의 낭만과 자유는 물론 지성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조차 없었던 1980년대, 고뇌하고 깨우치고, 현실의 두터운 벽을 넘어서려다 깨지고 쓰러진 젊은 청춘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가운데 한 사람, 박선영이 있다.
1987년 6월항쟁 하면 박종철, 이한열을 떠올리지만, 6월항쟁이 가능하기까지에는 수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80년 초반 군에 강제 징집돼 의문의 사체로 돌아온 아들, 바다에서, 산속 동굴 안에서 사체로 발견된 젊은 청년들, 독재정권에 항거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대학생, 노동자들. 그들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에 의해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뿌리뽑힌 강제된 죽음이다. 국가 폭력 앞에 부서진 삶이다.
그 가운데 박선영이 있다. 박선영의 스물두 해 짧은 삶을 기록한 이 책은 박선영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80년대를 살아야 했던 대학생, 노동자의 삶과 고뇌가 함께 녹아 있다. 상록수의 주인공과 같은 박선영 아버지의 남다른 젊은 교사의 참교육 실천, 박선영의 출생에서부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어려운 생활을 이겨내고 대학생이 되고부터 세상의 모순을 깨달아 가는 시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학생운동 비장함을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박선영의 짧은 생애를 읽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건조하기까지 한 생애의 기록이 한 사람에 대해 깊숙하게 파고들게 한다. 그저 남의 삶을 살짝 엿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살아냈던 그 시절의 내밀한 아픔을 계속 파고들게 한다. 작가가 작가로서 욕심을 자제하고 꾹꾹 눌러써야 했던, 감내해야 하는 시간을 공을 느낄 수 있다.
작가가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인물의 감정을 고조시켜서 긴장감을 높이고 싶은 욕심이 왜 없었겠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기까지 극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았을까. 작가가 작가적 욕심을 억제하면서 사실에만 근거해 박선영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하려 한 노력이 이 책에서 박선영과 그 가족의 삶을 구체화하고, 책을 읽는 독자와 동일시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삶을 들여다보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나의 시절과 그때 느꼈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은 스물둘의 짧은 생을 살다 별이 된 한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춘 게 아니라 80년대를 거쳐온 모든 이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와 같이 살아온 이들을 떠올리고 아픔을 느끼며, 때로는 울컥 눈물을 보이다가, 박수를 보내게 된다.
박선영의 죽음 이후 가족의 변화도 주목해 봐야 한다. 가족은 슬픔에 젖어 무기력하고 쓰러지지 않았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언제나 박선영을 지원하던 든든한 뒷배였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돌연 치마를 걷어붙이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딸의 시신 위에 사지를 맞대고 엎드려 누웠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모두 망연자실한 얼굴로 어머니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선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대고 천천히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쉰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아가, 선영아……. 내 죄여. 내가 잘못했다. 니가 허고 싶은 대로 허게 부모가 밀어줘야 쓴디, 이렇게 생목숨을 끊을 때까지 왜 이렇게 몰르고 너를 말겼는가 모르겄다. 아가, 엄마가 약속헐게. 니가 허든 일을 내가 헐게. 니가 죽은 그 시간에 나는 죽고 너는 살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니가 허든 데모, 니가 허든 민주화를 내가 헐게. 암것도 걱정 말고 편히 쉬어라, 아가…….”
“거시기, 내일도 저녁차로 또 올라가야 허는디.”
“자네 맘대로 하소만……, 죽지만 말어.”
소금을 그러쥐던 아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내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소리 없는 눈물이 거죽만 남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어깨를 떨며 우는 아내를 외면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죽지 말고, 밤차로 댕이지 말고, 굶고 댕이지 마. 글먼 더 이상 말 안 헐라니까.”
죽음! 혈육을 잃은 슬픔을 겪은 이들에게 죽음이란 말처럼 생생한 현실이 또 있을까! ‘죽지만 말라’는 아버지의 말은 아내의 투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약속하는 중대한 선언이었다.
어머니의 극적 변신은 80년대 유가협 부모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부모들은 시위 현장에 맨 앞에 섰으며, 최루탄도 백골단의 폭력도 피하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두려움이 없었다. 박선영 어머니는 광주, 서울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면서 시위가 있는 곳을 찾아 맨 앞에 섰다. 이후 유가협 부모님과 함께 투쟁하면서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사의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은 2025년이 된 오늘에도 변하지 않는 슬픈 현실이다.
아버지의 변화도 극적이다. 60년대 동아일보에 상록수 교사로 알려진 참교사였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일에 발이 묶여있었다. 딸의 죽음 이후 무엇엔가 이끌리듯 YMCA 광주 교사 모임에 참가한다. 이후 전교조 활동에 전력을 다한다. 전교조 전남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참교육 운동의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다, 2008년 영면했다.
두 분의 이력은 박선영의 삶보다 길고 강고하다. 각기 평전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 무수한 이야기와 깊이가 있지만, 작가는 하나의 장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고, 압축해서 설명함으로써, 박선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선에서 한정하는 인내심을 보여줬다.
이 책은 개인사이자 가족사이고, 투쟁사이다. 목숨을 건 항쟁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문학의 귀한 결실이다. 작가는 철저한 고증과 꼼꼼한 인터뷰를 통해 개인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 꾹꾹 눌러씀으로 인해, 평전에도 손색없고, 소설보다 풍부한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소설과 에세이, 평전을 포괄하는 문학서이자 구술문학의 지평을 확장했다.
또 이 책은 교사와 교사를 준비하는 교대 학생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왜 교사와 교대생들이 읽어야 하는지는 이주영 선생의 추천사로 갈음한다.
박선영 열사의 죽음은 1980년대에 초등교사를 양성하던 교대라는 곳이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반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인 공간이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당시 초등교사 양성기관의 이렇듯 열악한 상황은 곧 초등교육 현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미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박선영 열사를 교육민주화운동 관련자 명단에도 당당히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공감하실 거라고 봅니다.
40여 년 동안 박선영 열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온 추모사업회에 박수를 보내며, 이 책을 예비교사와 조합원 동지들이 많이 읽기를 소망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교육민주화와 민주사회를 위하여.
_이주영(전교조 교육민주화 운동 관련 해직교사 백서 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