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쇠락으로 꽃 피우지 못한 중국보다 앞섰던 홍화청자〉
고려 중기에 표주박 모양의 기형을 연꽃잎으로 감싸듯이 조형한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靑磁辰砂蓮花文瓢形注子)는 높이 33.2㎝, 밑지름 11.4㎝로서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제133호다. 그런데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털에서는 ‘진사’가 아닌 ‘동화’라는 단어를 써서 ‘청자동화연화문표형주자(靑磁銅畵蓮花文瓢形注子)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진사(辰砂)는 도자기 표면에 문양이나 그림을 산화동(酸化銅)으로 붉게 그리는 채색법을 가리킨다. 그 채색기법은 고려 중기부터 사용되었는데 조선 후기인 18~19세기에 더러 쓰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조 들어 도자기술이 쇠락하면서 그 채색법도 퇴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화동으로 선명한 붉은 색을 내기가 쉽지 않다. 가마불의 세기에 따라 담황색, 암록색, 암흑색 등으로 발색하는 까닭이다.
이 고려청자는 한마디로 국보에 어울릴 만큼 조형미가 탁월할 뿐만 아니라 청색과 홍색의 발색도 출중하여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걸작이다. 청화백자 개발이 도자발달사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는 도자기에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 장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기물은 회화적 장식기법이 적용되었다. 원대 이전에는 도자기를 옥기를 만들 듯이 칼로 깎고 다듬어서 장식효과를 냈다.
다시 말해 마르지 않은 태토를 칼로 깎고 파내는 방식으로 문양을 만들어 장식했다. 더러 첨화(添畵)라고 해서 장식물을 만들어 붙기도 했다. 즉 조각적 기법으로 도자기를 장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고려청자는 조각적-회화적 장식기법이 화려하게 결합해 태어난 작품으로서 푸른빛의 비색(翡色)도 뛰어나다. 무엇보다도 보기 드물게 청자에다 유약 밑에 그린 붉은 색의 유하채(釉下彩-Undergrazing)가 특이하다. 연꽃잎 가장자리를 홍색으로 채색한 장식이 그것이다.
이 고려청자는 복을 부른다는 표주박 모양의 기형으로서 신성, 청정을 뜻하는 연꽃의 꽃잎으로 감싼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꽃잎 가장자리를 붉은 색으로 채색했다. 이 주자를 언뜻 보면 장식문양의 끝이 뾰족하여 파초문으로 보이나 꽃잎 줄기가 직선으로 뻗어있다는 점에서 연꽃잎이 맞다. 파초문은 가운데 굵은 잎줄기가 있고 거기서 잔줄기가 사선으로 펴져나간다.
칼로 파낸 연꽃잎 줄기에 유약이 고여 청색이 더 짙게 나타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연꽃봉오리 모양의 아가리에는 뚜껑이 덮여있다. 잘록한 목 부분에는 동자가 연꽃 봉오리를 두 손으로 껴안고 있다. 잎줄기를 살짝 구부려 붙인 손잡이 위에는 개구리 한 마리를 앉아 있다. 액채를 따르는 주구(注口)는 줄기가 달린 연잎을 말라서 붙인 모양이다. 한마디로 회화적 장식기법과 조각적 장식기법이 만나 태어난 걸작중의 걸작이다.
이 기물은 경기도 강화도 최항(崔沆)의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가 1257년 사망했다는 점에서 이 고려자기는 고려 고종 재위기간(1213∼125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청화백자는 1320년대 후반에 개발되었다는 학설이 사실상 정설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산화동으로 유약 밑에 붉은 색을 내는 유리홍(釉裏紅)도 청화백자와 같은 시기에 개발되었다.
그 점을 고려하면 고려가 유하채를 중국보다 훨씬 먼저 도자기 제작에 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에 앞서 북송의 자주요(磁州窯)가 유하채(釉下彩) 도기를 생산했지만 이 작품은 청자가 그 채색법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자주요는 청화백자와 제작방식이 비슷하여 유약 밑에 산화철로 검은 그림을 그린 도기를 생산했었다. 다른 점은 자주요의 철화석기는 도기였고, 코발트로 푸른빛을 내는 청화백자는 자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고려 말기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국력이 쇠퇴해져 청자와 홍화가 꽃을 피우지 못해 조선은 다양한 채색자기를 개발하지 못했다. 산화코발트는 중국에서 재수입해야 하는 형편이기에 청화백자는 재료난으로 생산량이 아주 희소했다. 하지만 홍화와 철화의 재료인 산화동과 산화철은 넉넉한 편이었지만 그것들을 채색자기 도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탓이었다.
중국은 산화동을 이용하여 많은 유리홍자기를 생산했으며, 또 산화코발트와 산화동을 함께 써서 훌륭한 청화유리홍자기를 제작했다. 조선은 무능, 무식, 무지하고 무도한 임금들이 어좌를 차지하고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경제적, 문화적으로 융성할 수 없었다. 그 탓에 나라가 잇단 호란, 왜란을 맞아 강산이 유린되고 백성이 도륙되는 망국지란을 겪었던 것이다.
여기서 진사라는 용어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진사는 수은과 황의 화합물인 광물을 일컫는데 왜 굳이 진사라는 근거도 부족한 어려운 단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산화동으로 채색한 도자기를 조선시대에는 붉은 점을 그렸다고 주점사기(朱點沙器), 또는 아주 붉다는 뜻으로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진사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산화철을 사용하여 검은 색을 내는 문양이나 그림을 철화(鐵畵)라고 일컫
는다. 철화백자가 그 예다. 그 점에서 산화동을 사용해 그린 문양을 동화(銅畵)라고 불러도 좋
을 듯하다. 그러나 청화백자에서 볼 수 있듯이 재료보다는 색채로 표현하는 방식이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유약 밑의 붉은 색이라는 뜻으로 유리홍(釉裡紅), 일본에서는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로 적회(赤繪)로 표현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진사 대신에 홍화(紅畵)가 좋을 듯하다. 적화(赤畵)는 색채가 너무 강렬한 느낌도 주고 어감도 좋지 않다.
〈터무니없는 극찬 넘친 달항아리 엉터리 감상법〉
조선백자 가운데서도 달항아리는 유독 인기가 많아 고명한 인사들의 칭송이 그치지 않는다. 달항아리를 보기만 해도 예찬이 저절로 나온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떤 전시회 도록에는 세계도자사상 달항아리처럼 거대한 둥근 항아리가 제작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찬사가 나온다. 중국에는 달항아리 같이 훤칠하고 우람한 항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조선 달항아리의 순백미와 균형감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느니, 순백의 아름다움은 세계인의 흠모와 찬탄의 대상이라는…등등. 온갖 미사여구가 쏟아진다. 중국도자발달사는 고사하고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도록이라도 한번만 봤으면 그 같이 좁은 시야에 갇힌 무지와 무식이 넘쳐나는 글을 함부로 쓰지 못할 것이다.
조선의 달항아리는 백자지만 표면에 백장토(白裝土)를 발라 구웠다. 백장토는 도자기에 화장하듯이 입힌 흰 흙을 뜻한다. 백자에 굳이 백장토를 바른 이유는 태토가 유백색이나 설백색을 내지 못하거나 잡티가 많아 그것을 감추려고 발랐다고 보아야 한다. 자토에 철분이 많이 섞여있으면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나마 백장토를 군데군데 덜 바르기도 했고 바르다 그만 둔 듯한 기물도 있다. 또 가운데 둘레의 이음매를 잘 다듬지 않아 더러 울퉁불퉁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도공들이 정성을 다해 만들지 않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작업환경이 열악하다보니 대충 만들었다는 소리다.
달항아리 중에는 좌우와 상하가 1:1의 비율을 이루지 못한 비대칭이 많다. 어떤 기물은 상하비율이 좌우비율보다 훨씬 커서 달 같은 둥근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음매가 반듯하지 않고 불이 고르지 않아 거의 조금씩 찌그러진 모양이다. 그마저도 불완전연소에 따른 산화로 인해 군데군데 황갈색을 나타내기도 한다.
달항아리는 거의 성형(成型)과정에서 생긴 접합부위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거나 번조(燔造)과정에 불을 잘못 관리해 찌그러지거나 틀어져 거의 완벽한 구형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을 통한 평면을 보더라도 정원(正圓-Roundness)을 갖춘 달항아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지러진 구형의 비대칭을 두고 달항아리만이 지닌 아름다움이라는 찬미가 잇따른다.
그 모양을 두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칭송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그 찌그러진 결점이 달항아리만이 지닌 매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달항아리는 성형-번조기술이 모자라 완벽한 구형(球形-Sphere)을 이루지 못한 탓에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예찬할 일이 아니다.
도자기의 빙렬은 기술부족이나 번조과정에서도 생기지만 오래 세월이 흐르면서 일어나는 미세한 수축현상으로 인해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어떤 도자기는 저절로 금이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생긴다. 그 빙렬은 세파를 견디어 낸 나이테 같아 도자기 감정의 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더러 유약표면에 잔금이 간 달항아리도 있다. 바로 그 금을 인위적인 장식기법인 냥 찬사를 늘어놓기도 한다.
〈이도다완은 정치적 가치가 창출한 역사적 산물〉
조선의 볼품없게 생긴 막사발이 일본에서 이도다완이란 이름을 얻으며 국보급으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 막사발이 이국 땅에서 일구어낸 놀라운 신분상승이다. 그 까닭에 이도다완에 대한 한국인들의 필설로 다하지 못한다는 경탄, 찬사가 시간을 초월해 이어진다.
그런데 평상인의 눈에는 그저 조악한 막사발로 비칠 뿐이지 그들이 말하는 예술의 경지가 보이지 않는다. 애국적, 민족적 시각에 충실하다보니 작품성과 예술성을 꾸며내어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나보다. 그것은 무지의 위선이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군벌이 조선 막사발에 가루차를 타서 한 모금 씩 나눠 마시면서 충의를 다졌다고 한다. 또 선물로 주고받으며 동맹을 포섭하고 복속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찻잔에 스며든 그 같은 정치적 사연이 그 가치를 무한에 가깝게 끌어올리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한 세력이 조총을 앞세워 해외로 원정나간 첫 침략전쟁이자 조공국이 종주국인 명나라와 싸운 전쟁이다. 조선에서 수탈한 막사발은 그 전쟁의 상징적 전리품이다. 절대적 권력자 쇼군 앞에서 그 전리품을 놓고 무용담을 말하고 국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수백년간에 걸친 격동의 정치사가 이도다완에 쓰며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창출해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도다완이 일본에서 국보급으로 대접을 받는 이유는 수백년간에 걸친 일본역사의 격동적 내력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도다완은 권력자의 애장품이었다는 점에서 소유 자체로서 권력과 금력을 과시한다. 거기에다 일본 다인(茶人)들의 고매한 심미안이 찬사를 보탬으로써 조선의 막사발이 이도다완이란 국보로 재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