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소설 「마담 에드와르다」, 「나의 어머니」, 「시체」에 관하여
“한순간도 나의 뇌리에 신이 떠오르지 않았고, 내가 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혹의 광증과 환희 속에서였다. 내가 찾는 것은 오로지 공포에 휩싸인 죄악, 내 안에서 안식의 바탕을 뒤흔드는 격정이었다.”
“나도 더 이상 나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를 보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더 이상 자신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지 않았으리라.”
“나는 앙시를 사랑했지만, 실은 사랑의 밑바닥까지 침몰할 수 있는 그녀의 가능성을 사랑했다.”
프랑스 지성사에서 철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경제학 등 전방위적 영역에 지대한 유산을 남긴 조르주 바타유는 그동안 대표적인 사상서 『에로티즘』, 『저주받은 몫』, 『에로스의 눈물』 등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하지만 그의 다채로운 글쓰기 저변에는 언제나 문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대표 소설 『눈 이야기』, 『하늘의 푸른빛』 등은 그만의 독자적인 길을 묵묵히 증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에로티시즘을 주축으로 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이상한 광기, 전복을 향한 열광적인 몸부림으로 줄곧 표현된다. 이 책의 세 편의 소설 「마담 에드와르다」, 「나의 어머니」, 「시체」에서도 그 에너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담 에드와르다」와 「시체」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비의미의 글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전통적 의미의 발단이나 결말이 없다. 즉 두 소설의 경우 처음과 끝에 어떤 차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두 소설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쾌락과 고뇌를 동반하는 성적 유희가 논리적인 변형의 맥락 없이 반복적으로 전개될 뿐이다. 바타유의 글쓰기는 애초에 논리가 아니라 역설, 완성이 아니라 미완성을 운명으로 하기에 고정된 의미의 산출을 전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소설에서 섹스하고, 배회하고, 죽거나 다치고, 취하거나 잠들고, 의미 없이 웃고 의미 없이 대화하는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볼 뿐이다.
이 책의 주축이면서 장편으로 분류되어도 될 분량의 「나의 어머니」는 바타유의 가족사를 우회적으로 비추는 소설로서 가장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로 꼽힌다. 「마담 에드와르다」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일컬어지지만, 「나의 어머니」가 훨씬 더 자전적 색채가 짙은 소설임이 확인된다. 특히 주인공 이름은 ‘피에르’로, 바타유는 ‘피에르 앙젤리크’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바타유처럼 청소년기에 사제가 되려고 결심했던 피에르는 소설의 종결부에서 근친상간의 문턱에 이르고, 소설에서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어머니의 자살은 작가 바타유의 실제 삶과 무관하지 않다.
바타유의 미완성 유작 「나의 어머니」는 몹시 고통스러운 자전적 소설이자 ‘에로티시즘 입문소설’로 알려져 있다. 「나의 어머니」는 바타유의 소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한 브라이언 피치에 의해 플로베르의 『감정교육(L’ducation sentimentale)』을 본뜬 ‘색정교육(l’ducation érotique)’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폭력과 광기와 무자비한 성교가 판을 치는 「나의 어머니」가 ‘나’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나’와 관계하는 여자들, 어머니가 아들에게 소개한 레아와 앙시는 모두 어머니의 연인이어서 어머니는 아들의 ‘색정교육’ 전체를 관통하는 축이자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끝내 근친상간이라는 극도의 과잉을 제시하고 주인공들은 성적 황홀경에 여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부조리한 광경은 언제나 그랬듯, 바타유 개인의 성적 취향이라거나, 어그러진 윤리관이라거나 정신이상자의 헛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목표를 제시하기 위한 소설적 전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