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태삼 시인의 시에서 읽히는 것은 이상향의 실현이다. 석정의 시에서 ‘그 먼 나라’로 표방되는 이상향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훗날 먼 곳’을 상정하지만, 시에서 얽고 얽히는 인연의 골짜기는 지금 바로 고향 동네인 셈이다. 남도 물줄기 굽이도는 아랫녘 구례땅, 구례의 산천인 것이다. 야트막한 선산 자락에는 조부모님과 선친의 유해를 모시고, 이곳 가까운 거리 작은 마을 하나 짓고, 돌담 그윽이 돌아 돌아 고운 인심들 속살거리는 소리,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곳, 고택 그을음 앉은 채 거기 그대로, 현대의 스승인 과거가 빛나게 과거인 채로, 사서오경쯤은 능히 뗀 학자님 댁 솟을대문 그대로, 떡 벌어진 안채는 고풍스런 모습 그대로, 사람의 집들만 고즈넉할 터이다.
그곳은 한 가닥의 갈등도, 한 뼘의 시샘도, 한 타래의 의심도 깃들지 않고 무엇 하나 부러움 없는 유일무이한 그 댁만의 별유천지일 것이다. 시인의 유토피아이고 시의 모태일 것이 분명하다. 지리산의 기운이 섬진강 굽이로 풀리어 흐르는 곳, 매천 황현 선생의 기침 소리도 들리는 듯한 유서 깊은 곳, 아홉 번 절하고 아홉 번 예 갖춤으로써 비로소 한 동네가 민속의 가운데에서 우뚝 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