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다시금 재현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 나온 시민들과 190인의 의원들 덕택에 12월 4일 1시 1분경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어 5시 4분경에 4시 30분에 있었던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가 의결되었음이 발표되었으나, 그 6시간 사이에 국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범야권은 1차 탄핵소추안을 공동 발의하였으나 여당은 탄핵 반대 및 표결 불참을 당론으로 정했고, 결국 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매서워진 추위에도 거리로 나와 탄핵을 촉구하였고, 덕분에 이어진 2차 탄핵소추안에서는 재석 300표,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이후 피의자로 입건된 현직 대통령에 대해 공조본은 서울서부지법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2025년 1월 3일,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으나 경호처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같은 달 15일, 재차 발부받은 체포영장의 집행에 성공하였으며, 같은 날 피의자 측이 서울중앙지법에 신청한 체포적부심은 다음 날 기각되었다. 그리고 1월 19일에는 서부지법에서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자 그 지지자들은 서부지법을 습격하고 경찰과 기자들을 향하여 폭력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어째서 일어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여태까지 일어났던 상황들을 무미건조하게 되짚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질문에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흐름과 맥락, 배경을 되짚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은 매우 정치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도 매우 정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도구로서 매우 적실하게 제시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책이 논하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미학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내용을 소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다수체의 다섯 가지 유형 개념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 다섯 가지 유형이란, 인간 서식지로서 물리적 세계인 HP-I,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영역인 HP-II,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 내부-공영역인 HP-IV,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이다. 이제 이 다섯 가지 개념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사건들을 재조명해 보자.
HP-I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가족, 지역, 국가와 같은 물리적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정치화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갖고 있던 배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HP-I은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 헌정사의 비극은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영역인 HP-II의 결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여당과 야당의 협치는 실종되었고, 서로의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정쟁을 일삼은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권 정치만의 상황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곤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정치 이야기가 곧 분쟁이 되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내 준다. 우리의 HP-II는 병들어 있는 것이다. 이 병든 HP-II가 우리가 마주한 비극의 배경이었다. 이러한 HP-II를 바라보며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잠재적 세력이 바로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다. 갑작스럽게 비상계엄 시국을 접하게 된 우리 시민들 모두가 이러한 HP-III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는 HP-II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다. 비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과 달리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외국인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바로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HP-IV다.
HP-IV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자리한 공영역이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내부-공영역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즉 주로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와 때때로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까지를 포함하는 이들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내부의 의견교환을 바탕으로 현실의 공영역인 HP-II에서 우리의 의견을 개진하게 된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드러난 더욱 심각한 문제는 HP-II에 만연했던 우리 사회의 질병이 결국 우리 사회 내 일부 구성원들의 HP-IV마저도 감염시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HP-V를 자신의 내부-공영역에 초대하여 HP-III로 삼기는커녕 HP-III마저도 자신의 내부-공영역에서 HP-V화해 버린 이들은 상대를 배척하고 상대와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마치 하버마스가 SNS에 대해 진단한 것처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차폐된 반향실로 후퇴하고”(하버마스 2024, 58) 있었다. 이들은 위중한 시국에도 자신의 차폐된 내부-공영역 속에서 자신과 유사한 목소리들만을 메아리치게 했고, 그것을 HP-II로 확대 재생산하고자 했다. 다행인 것은 이들이 소수에 불과하며, 다수의 시민과 일선 군인들의 HP-IV가 제대로 작동한 결과, 우리는 또 하나의 “서울의 봄”을 맞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다.
HP-IV가 제대로 작동함으로써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사례를 살펴보자. 야당의 모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으로 하여금 본회의장에 출입이 불가했던 당시 여당 당대표를 본회의장으로 인도하게 했다. 본회의장이라는 HP-II에서 배제된 타자로서 HP-V에 속했던 당시 여당의 당대표를 자신의 내부-공영역에서 비상계엄이라는 위중한 시국에 함께해야 할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본회의장이라는 HP-II에 구현해 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여당 당대표는 계엄군에 의한 체포를 피할 수 있었고, 그를 따르는 일부 여당 의원과 범야권의 단합된 계엄 해제 결의라는 현대사의 한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 계엄군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가 계엄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이미지와 달리, 이들은 국회 안에 밀집한 시민들을 마주하고는 자신이 부여받은 임무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방식으로 항명했고, 덕분에 우리는 비극적인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몰린 시민 중에 자기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 즉 HP-III로서의 시민들을 자신의 HP-IV에서 HP-I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을 것이다. 이처럼 HP-IV의 비정상적 작동은 헌정사의 위기를 불러온 한편, HP-IV의 정상적 작동은 그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며 위기 극복의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간다수체의 다섯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살펴본 현 정국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미처 완결짓지 못한 그의 정치철학을 대신해서 계속 써 내려가고자 한 시도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정신의 삶』의 마지막 편인 ‘판단함’을 끝까지 써 내려갔다면, 그것은 학계 전반이 동의하듯이 임마누엘 칸트가 집필한 『판단력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두고 쓰였을 것이라는 데 기반을 두고, 아렌트가 칸트의 미학을 자신의 정치미학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보면서 아렌트의 ‘새로운’ 정치철학을 써 내려가고 있다. 아렌트는 과연 자신의 미완성 유작인 『정신의 삶』에서 어떤 정치철학을 내놓고자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그가 주창한 새로운 정치철학의 사명은 ‘사유의 정치적 유의미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아렌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분리 전통에 맞서 양자의 상호연계성을 조명하고, 나아가 양자의 결합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내놓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철학, 정치미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미학은 우리에게 정치적 삶을, 즉 우리의 ‘폴리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