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과 노동 환경의 변화
디지털 기술에 근거한 새로운 혁신적 사업을 발 빠르게 선점해나가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다. 이른바 공유경제, 플랫폼 경제 등 디지털 시대의 대표적인 혁신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술’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시각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기술의 발전에 대한 의심이나 저항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디지털 시대 기술적 패러다임의 특징과 산업 영역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변화를 디지털화, 초연결성, 플랫폼, 공유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디지털화(digitization)가 자연과 사회의 모든 현상, 움직임, 활동을 0과 1이라는 숫자에 기반해 데이터로 만드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초연결성은 사람과 사물, 생물과 무생물 등 세상의 주체와 대상들을 상호연결하여 데이터에 기반한 새로운 기회, 사업을 창출하는 기반이다. 플랫폼은 그러한 자원들을 모으고 연결하고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는 무대이자 틀이며, 공유경제는 자본주의 시장 외곽에 존재하던 자원들을 데이터화하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연결하는 상품화 과정이다.
저자는 오늘날 디지털 기술의 잠재력과 사회적 파급효과를 검토함과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노동권 후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기술에 대한 ‘사회 구성론적 접근’, 즉 기술을 사회적 과정의 일종으로 보면서 기술 변화의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문화적 요소가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인간 통솔’의 원리를 제기한다. 인간의 노동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인간이 내려야 하며, 자본주의적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반해 기술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윤이 아니라 자유시간 극대화 원리에 따라 기술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지털 시대, 노동권의 후퇴와 상실
노동의 탈경계화는 노동의 시공간 경계, 고용과 비고용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이다. 임금노동 영역 외부에서 독자적 사업을 수행하던 자영업자가 사용자에 종속된 임금노동자와 유사하게 변화하는 경향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동네에서 점포를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은 어느덧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본부에 종속된 가맹점주가 되고, 플랫폼 노동 등 고용과 자영의 경계가 모호한 영역에서 비고용 형식의 새로운 노동형태가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노동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적 노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임금노동, 고용된 노동과 유사한 일을 수행하면서도 탈경계화로 임금노동의 형식이 모호해져 임금노동자,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부터 배제된다는 데 있다. 나아가 고용에 따르는 사회적 권리인 노동권이 해체되거나 그로부터 배제되는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오늘날 나타나는 노동의 탈경계화는 노동의 종말 혹은 탈노동 사회로의 진입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의 불안정성이 심화되는 현상을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이러한 노동의 탈경계화는 디지털 시대 노동권의 후퇴를 의미하고 노동자 정체성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임금노동, 고용의 형식이 모호해지고, 그로 인해 노동과 결부된 권리로부터 배제된 노동이 확산되면, 해당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에 대해 갖는 애착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노동권을 보장받는 노동이 줄어들며,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층이 확장되면서 결국 노동권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노동의 탈경계화와 임금 중심 사회의 위기
노동의 탈경계화는 임금노동을 근거로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던 사회적 틀을 흔든다. 즉 임금노동의 형식이 모호해지면서 임금노동과 결합해 온 사회적 보호망에서 노동자들을 배제한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우리는 고용이 명확하지 않은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제도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면서 생존의 위험에 내몰리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편 고용형식이 모호한 노동자들에게 임금노동자의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노동자성’ 인정 여부가 관건이 되면서, 언젠가부터 이를 둘러싼 공방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우리는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라 노동이 불안정화되고 노동권과 사회적 보호로부터 제외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사회에 들어섰다. 물론 임금노동 형식 자체가 의문시되는 노동도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임금노동 관계에 근거한 사회 조직화와 운영이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임금노동자의 지위를 근거로 권리가 부여되는 임금 중심 사회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임금 중심 사회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는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된 노동권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탈경계화된 노동자 집단을 포괄할 수 있도록 노동권의 내용과 포괄범위를 확장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노동권을 임금노동에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
1장에서는 기술과 노동의 역사를 다루며 현대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기술과 그에 따른 노동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2장에서는 노동의 의미에 대한 역사적 변화와 현대사회에 나타난 노동과 일상생활의 분리 현상,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임금노동 관계를 살펴본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전개되면서 노동과 자본 간의 타협으로 형성된 임금 중심 사회라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제도적 틀이 무엇인지도 고찰한다.
3장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이윤 주도의 기술 진보를 만들어내면서 제조업(자동차산업 사례), 서비스업(소매업 프랜차이즈),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업모델(플랫폼)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검토한다. 4장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기존 논의들을 검토한 후 실제로 오늘날 진행되는 노동의 변화를 살핀다. 오늘날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 노동의 변화는 일정한 경향성을 지니는바 이 책에서는 그것을 ‘노동의 탈경계화’로 개념화한다.
마지막 5장에서는 기술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회구성론의 관점에서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미래사회 담론으로서 탈노동 사회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임금 중심 사회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할 수 있는 노동권의 확대와 새로운 노동권의 구성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