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바라보며 세속의 일을 잊노라
중국과 한국의 많은 문인들이 지극히 사랑했던 매화는 선비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차가운 세파를 견디면서도 절개와 지조를 잃지 않는 지사(志士). 그래서 매화를 한사(寒士)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사군자의 첫머리에 놓은 까닭도 매화의 고고한 기품을 중시한 데 있다. 매화가 중국과 한국의 문인들에게 ‘선비의 꽃’으로 각인된 것은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임포(林逋. 967~1028)로부터이다. 그는 송나라의 은사(隱士)였다. 은사는 산림에 숨어서 사는 선비. 그가 지금의 항주(杭州) 서호(西湖) 물가에 있는 고산(孤山)에서 매화와 학을 친구로 삼아 숨어서 살았으므로 매화를 말할 때는 반드시 임포를 꼽았다. 그를 은사(隱士) 또는 일사(逸士)라는 말 대신에 처사(處士)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고사가 있은 뒤로 사람들은 매
화를 은일(隱逸)과 일사(逸士)의 상징으로 이해하였다. ‘은일’은 속세를 벗어나 산림에 숨어 사는 것을 뜻하며, ‘일사’는 은둔한 선비를 가리킨다. 그를 특별히 송나라 은군자(隱君子)라고
도 부르는데, 임포는 『성심요록(省心銓要)』에서 “만족할 줄 알면 즐겁고 탐욕에 힘쓰면 근심스럽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임포가 살다 간 뒤로 고려와 조선의 글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고산(孤山)이니 매호(梅湖)니 하는 명칭을 자신의 호(號)로 삼았는데, 이런 것들 또한 임포를 닮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포가 가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범석호(范石湖)라는 이가 나타나 『매보(梅譜)』(1186)라는 저작을 통해 ‘매화는 천하에 으뜸가는 꽃으로 운치가 있고 품격이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 그 뒤로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도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매화를 대상으로 무수히 많은 시를 남겼다. 비록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매화가 한국에 정착하여 문인들의 시에 흔히 오르내리게 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의 일로 볼 수 있다.
매화는 모양이 뛰어나게 예쁘거나 색이 현란하지도 않다. 기껏해야 홍색, 분홍색, 백색 정도이다. 그럼에도 매화를 뛰어난 기품을 가진 꽃으로 평가한 까닭은 찬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꽃이기에 인고와 역경을 견뎌내는 절개, 나아가 고결한 품성을 지닌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야에 살면서도 은인자중하는 일사의 모습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매화는 소위 사군자의 첫 자리에 두는 꽃이 되었다.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즉, 고결한 은둔자를 국화로 표현하듯이 매화는 가난한 선비(학자)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매화의 일생은 춥지만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라는 표현이 나
왔다. 이것은 매화라는 꽃을 빌어 군자의 지고지순한 세계를 표현한 것이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매화는 봄꽃 가운데 으뜸으로 꼽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