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임의 시에는 수많은 음악가가 등장한다. 모짜르트 쇼팽 바흐 존 레넌 베토벤 슈만 요한 스트라우스가 그들이다. 이어 첼로 피아노 등 악기들이 등장한다. 음악가들과 악기는 유수임의 인생의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특히 피아노는 아주 절친이다. 그녀는 “기억 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 “영혼에 생기를 넣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러면 “영혼이 맑아진다.”라고 고백한다. 사람이 그립거나 삶의 생기를 잃었을 때 피아노에 앉아 그리움을 달래고 생각의 생기를 얻는 것이다. 그만큼 피아노는 유수임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있다. 유수임은 피아노 앞에 앉는 또 다른 경우로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고 햇살의 무늬는 금빛, 은빛으로 피아노를 비추고 있을 때”를 적시한다. 삶의 시간들에 있어 아름답거나 행복감을 느낄 때 피아노에 앉아 그 감정을 고스란히 음미한다. 이처럼 유수임에게 있어 피아노, 즉 음악은 “외로울 때”도 “행복할 때”도 함께 하는 고마운 존재이다.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힐링공간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연공간일 수도 있고 예술공간일 수도 있고 상상공간일 수도 있고 삶의 현실 공간일 수도 있지만 유수임의 힐링 공간은 피아노와 함께하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갖는 행복감이다.
유수임의 시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들을 추앙하는 것보다 자신의 일상과 그 일상의 주변에서 만나고 바라보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오감으로 감싸 안는다. 붉은 석류를 시각적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 다음에 먹어본 맛을 본 미각적 느낌을 담은 이 시는 대단히 감각적이다. 그 감각은 우선 “붉은”이라는 시각, “톡톡 터지는” 청각, “허니콤” 같은 미각까지 담으면서 석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공감각적으로 다가온 맛있는 석류에게 “너의 매력 신은 어떻게 만드셨나!”라고 질문한다. 한편의 정물화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시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을 감각적 시선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시인은 그 사물들을 만나고 읽고 느끼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앞서 유수임의 시는 그녀의 삶과 일상 그리고 기억의 이야기이자 노래라고 했다. 여기에 관찰과 사랑의 노래라는 의미를 하나 더 보탠다.
최근의 시의 경향은 난해하고 말 많은 다변의 시작 풍토와 시류가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무슨 문제일 것도 없지만, 소통과 교류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시에도 기교가 있고 장치가 있다. 문학적 성취를 위한 형식일 수도 있고 내용의 차별화를 위한 자기변명 혹은 시 세계의 추구일 수도 있다. 나는 다변과 난해를 추구하기보다 투명하고 선명한 세계에 더 귀를 기울이고 눈과 코와 입 그리고 오감을 들이대기를 좋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을 물리치고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고 몸부림친다. 그 대상이 크고 작던, 어디에 있던, 사소하던 귀하던 그런 관념의 세계보다 실제로 숨 쉬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소중하다. 하늘과 공기, 별과 빛은 영원할지라도 이 지구상에서 생명 있는 것들이 영원한 게 얼마나 될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의 생명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의 소리를 시로 노래하고 그 노래는 길고 긴, 멀리멀리 여행가는 강물 같은 음악이 되어 흘러야 한다. 유수임의 질박한 언어의 시와 노래가 두 개의 주거지인 서울과 시드니를 튼실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으면서 빛깔 좋고 속 깊은 맛을 내는 과일같이 더욱 영글어 가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