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일구고 누구나 누리는 너른 마당이란 뜻을 품은
‘살림문학’이라는 새 자리를 펴다!
문학은 살림과 어깨동무 하면서
누구나 가꾸고 꾸리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넓어진다.
‘살림’과 ‘문학’이라는 익숙한 낱말을 나란히 놓아보자. 누구도 이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둘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낯설게 느낄 수 있지만 누구나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살림과 문학이 이토록 잘 어울린다는 걸, 서로 어깨동무 하며 너른 마당을 연다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문학은 살림 너머에 있거나, 특별한 순간을 아름답게 담은 것이라 여겨왔는데, 그와 달리 ‘살림문학’은 저마다가 꾸리는 살림 안에 수수한 뜻(문학)이 쟁여 있음을 말한다. 문학은 살림과 어깨동무 하면서 비로소 누구나 가꾸고 꾸리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넓어진다.
이 책은 2024년 5월부터 11월까지 진주문고에서 연 여러 모임에서 나눈 글을 손보고 여민 꾸러미다. 모임을 기획하고 진행한 문학평론가 김대성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도 바깥에서 크고 작은 모임을 꾸리며 누구나 누리며 나눌 수 있는 문턱 없는 문학을 일구어 왔다. ≪살림문학≫은 그동안 여럿이 함께 어울려 읽고 쓰며 이야기를 나눈 시간 속에서 맺힌 작은 결실이다.
이 책 맨 앞자리엔 〈회복하는 글쓰기〉가 놓인다. 〈회복하는 글쓰기〉는 2017년부터 매년 희미하게 이어온 글쓰기 모임으로, 2024년엔 진주문고에서 ‘살림글쓰기’라는 이름을 덧붙여 모임을 꾸렸다. 에세이나 수필, 혹은 생활글이 아니라 ‘살림글’이라는 새말은 내어놓는 까닭은 살림을 바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꾸밈없이 드러내기에 누구나,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살림을 돌보며 둘레를 돌아보는 일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회복) 누군가를 도우며 어깨동무하는 길임을 가리키는 글들이 ≪살림문학≫으로 즐겁게 들어갈 수 있게 마중 나온다.
달리기는 여러 ‘쓰기’가 이루어지는 너른 마당이기도 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쓰기’는 글쓰기에만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일’이나 도시를 누빌 때도 ‘쓴다’고 할 수 있다. 〈진주 쓰깅〉은 달리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 달리고 나서 돌아본 것들뿐만 아니라 마을 여기저기를 누비는 발걸음이 남긴 자취를 글로 옮긴 새로운 글쓰기 모험이라 할 수 있다. 30대부터 60대까지, 처음 달리는 이부터 달리기꾼에 이르기까지 저마다가 누리는 달리기 살림글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다.
〈빗자루와 연필〉은 살림하는 손과 글 쓰는 손이 같다는 뜻으로 빗자루 ‘쓸기’와 연필 ‘쓰기’를 나란히 놓아본 모임이다. 살림하는 이는 글 쓸 시간이 없고, 글을 쓰는 이는 살림을 꾸릴 시간이 없다 여겨왔지만 손수 살림을 꾸리는 이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글쓰기와 청소, 쓰기와 쓸기. 쓰기가 나아가려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쓸기와 어깨동무해야 한다. 치워야 채울 수 있고 비워야 찰 수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쓸고, 치우고, 채우는 살림. 빗자루와 연필은 오래전부터 등을 맞대고 서로를 북돋아온 동무다. 손때 묻은 살림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손수 짓는 밥에 손맛이 깃드는 것처럼 글쓰기도 매한가지다. 오늘 빗자루를 쥐고 둘레를 ‘쓰는’ 이만이 연필을 쥐고 글을 ‘쓸’ 수 있다 여긴다.
살림은 그저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날이 새롭게 펼치는 일이다. 되풀이는 살림을 꾸리는 힘이다. 새로움을 찾아 낯선 곳을 향해 나가는 걸음이 아니라 터한 곳에서 배우고 가르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에 세상(둘레)을 가꾸고 돌보는 일과 이어진다. 살림은 그야말로 끝없는 되풀이다. 이 끝없는 되풀이 안에서 사랑이 깃들고 영글기에 사람이 살 수 있다. 가만히 되짚어보면 되풀이 한 것만 베풀 수 있다. ≪살림문학≫ 안에도 살림살이를 바탕으로 일군 되풀이가 가득하다. 살림 안에서 일군 되풀이를 씨앗으로 삼아 곳곳에 심어 잘 돌보고 가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마다가 꾸리는 살림이 모여 누구나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너른 마당이 되길 바라며 이 작은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