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과 괴담 전문가로서의 탄탄한 내공이 돋보이는
조선판 다크 판타지
정명섭 작가는 자타공인 팩션 전문가이면서 괴담 전문가이다. 조선판 다크 판타지는 작가의 역량을 총망라하여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죽음에서 돌아온 암행어사 송현우는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점을 치는 천경당의 당주인 소진주가 제시하는 암행에 나선다. 이 암행이란 조선팔도의 갖가지 기이한 일들에 개입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송현우에게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에 대한 복수심, 왜 자신에게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실 규명의 욕구밖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팔도의 기이한 일들을 맞닥뜨리며 백성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에게 잠재된 공적 욕망을 각성하게 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자연스럽게 구사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괴담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공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괴담은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게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장화홍련전〉에서는 원초적인 복수심을 보여주는 한편, 사또를 찾아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에피소드가 있는데 작가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괴담과 전설들에, 원한과 복수를 더해 『암행』을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였다.
어둠을 통해 빛을 말하는
시의적절하면서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이야기
『암행』의 ‘암행’은 ‘어두울 암(暗)자’에 ‘움직일 행(行)’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이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님’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암행어사가 그와 같은 일을 하는데 『암행』의 ‘암행’은 거기에 더해 ‘어둠을 걷는다’라는 내용적, 이미지적 의미를 더한 중의적 단어이다.
송현우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어둠 속을 헤매는 인물이 된다. 스스로 삶을 꺼트리려 했으며 제 의지와 무관하게 죽음에서 돌아와 황폐화된 상태에서 정처 없는 여정을 떠난다. 장르 스토리의 주인공답게 극단화된 상황 속에 처해 있지만, 우리 삶은 그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가지 형태로 좋았던 순간에서 최악의 순간으로 떨어지는 일을 겪는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오늘의 세계는 사실상 암흑기를 걷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미래 혹은 다음 세대의 희망을 위해 한 줌의 빛이라도 얻고자 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이러한 ‘암행’을 시각적인 장치를 활용해 장르적이면서도 고유한 작품의 톤을 구현하였다. 검은 안개, 까마귀, 검정개, 검은 눈동자, 검은 태양 등 작가가 설정한 암흑의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빛을 갈망하고 끝내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