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시스 잠, 백석, 윤동주
백석과 윤동주를 사랑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프랑스 작가 프랑시스 잠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백석과 윤동주가 자신들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별 헤는 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시어의 토씨까지 고심하는 시인이 자신의 시에 다른 시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남다른 일이다. 일제 치하의 엄혹한 시절, 두 청년에게 프랑시스 잠은 이역만리의 별이었다.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 잠의 시는 단 여섯 편에 불과했다. 프랑스어 원본이나 영역본을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으므로 백석과 윤동주가 읽은 잠의 작품집은 일본어 번역본이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당시 잠의 일본어본 중에서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번역시집 《프랑시스 잠 시초(フランシス・ジヤム詩抄)》는 단연 눈에 띈다. 이 일본어본은 잠의 대표 시집《새벽 종소리에서 저녁 종소리까지》 등 다섯 권의 시집에서 시 71편을 골라 번역하고 해설까지 곁들임으로써 잠의 시 세계를 집결했다. 호리구치의 번역을 통하지 않고서 당시 잠을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미요시 다쓰지가 번역한 산문집 《밤의 노래(夜の歌)》(1936)는 윤동주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것이 현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윤동주와의 연관성이 분명하다. 김용민 역자는 두 일본어본의 프랑스어 원전을 곧바로 우리말로 번역해 잠의 문학 세계를 새롭게 국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 《프랑시스 잠 시초(フランシス・ジヤム詩抄)》의 시 71편 중 소실된 3편은 이번 책에서 제외됐다.
자연, 고향, 가족 그리고 사랑을 소박하게 노래한 프랑시스 잠
백석과 윤동주와의 관련성을 차치하고서도 프랑시스 잠의 문학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문단은 한때를 풍미한 상징주의 시풍이 쇠락하고 있었다. 이때 잠은 투명하고 단순하며 즉물적으로 자연과 고향, 가족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며 문단에 새 기운을 불어넣었다. 예컨대 잠에게는 정신을 질식시키고 심장을 갉아 먹는 보들레르의 실존적·형이상학적 우울이나, 한 인간을 빗물처럼 눈물로 적시는 베를렌의 기질적 멜랑콜리 같은 게 없었다. 그 역시 삶 앞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가 사는 세계는 출구가 없는 비극적 공간이 아니었다. 잠이 사는 곳은 어둠 속에서도 부드러운 빛이 빛나는, 밤조차 부드럽게 노래하는, 따듯하고 선한 곳, 요컨대 살 만한 곳이다. 이를테면 조촐한 지상의 낙원인 것이다.
시는 정직해야 하고 정직한 것이 아름답다는 게 잠의 지론이다. 거짓과 꾸밈은 복잡하지만, 진실은 단순하다. 마치 단순해서 진실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이러한 진실의 추구가 잠의 단순성의 미학을 형성했다.
문단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프랑시스 잠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잠은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 말라르메, 앙드레 지드, 레니에, 사맹, 구르몽 등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프랑수아 모리아크, 쥘 로맹, 생 존 페르스나 쥘 쉬페르비엘 같은 후대의 작가들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며 존경을 표했다. 잠은 문단에서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활동 당시 대중들에게도 크게 사랑받았다. 그가 머물던 오르테스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고 문인과 독자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했다.
그의 인기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타국에까지 전해져, 독일의 작가 릴케는 그의 대표작 《말테의 수기》에서 잠이 바로 “내가 되고 싶었던 시인”이라고 말했고, 카프카 역시 자신의 일기에서 잠의 글을 읽고 대단히 행복한 상태를 맛보았다고 했다. 그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아시아에까지 전해져 결국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 그의 이름이 새겨짐으로써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친숙한 이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