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글자도서 소개
리더스원의 큰글자도서는 글자가 작아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편안한 독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글자 크기’와 ‘줄 간격’을 일반 단행본보다 ‘120%~150%’ 확대한 책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거나 글자가 작아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아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자기다운 삶을 살아라.”
- 장자가 전하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
우리 현대인의 삶은 불안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몇 년 뒤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발버둥치고, 또 다른 사람은 불안에 짓눌린 채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하며 체념한다. 한쪽에서 ‘갓생(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살고자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구직 활동을 포기하며 ‘그냥 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안한 현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길잡이로 삼을 만한 지혜는 없을까?
『문장의 온도』, 『천자문 인문학』 등의 저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역사와 고전의 새로운 가치를 전해 온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 한정주는 장자의 철학에서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지혜를 발견했다. 장자는 이미 2000년 전에 불안, 쓸모, 욕망 등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현명한 해답을 내놓았다. 장자에게 좋은 삶이란 얽매이지 않는 삶이다. 운명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불안에 얽매이지 않고, 앎(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심지어 자유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다. 이 책에서 ‘운명’에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근본 문제들을 살펴본 까닭 역시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방법과 지혜를 탐구하고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인가에 혹은 누구인가에 얽매이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얽매이지 않는 삶은 곧 자유로운 삶이다. 자유로운 삶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삶의 근본 문제들 즉 운명, 욕망, 불안, 앎(지식), 삶과 죽음, 자유 등에 대한 자기 삶의 길, 영토, 세계를 찾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장자 철학은 자기 삶의 길을 찾고 자기 삶의 영토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여정에서 좋은 길잡이가 된다. 장자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자기 삶의 길을 모색하고 또한 오직 자신의 힘으로 삶의 영토와 세계를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자는 삶에 대한 자신의 의문과 질문, 탐구와 모색의 전 여정을 『장자』라는 책 속에 남겨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장자가 남긴 삶의 철학을 해석한 이 책은 삶이 불안한 독자 스스로 자기 삶의 길, 영토, 세계를 모색하고 만들어 나가는 데 안내서이자 참고서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불안과 더불어 사는 법
『장자』 「잡편」 ‘어부漁父’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사람의 우화’는 불안에 대한 반응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철학적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신의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한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매일 불안과 공포에 떨던 남자는 마침내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먼저 그는 발걸음을 빨리하면 그림자와 멀어져 자신에게서 그림자를 떨쳐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빨리할수록 그림자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신의 몸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발걸음이 아직 느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더 속도를 빨리해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림자는 더욱 남자의 몸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는 속도를 더 올리면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서 멀어져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자 그는 더욱 빨리 달렸고, 그렇게 해도 그림자가 몸에 붙어 있자 더욱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욱 속도를 올려 달리고 또 달리다 마침내 기력이 다한 남자는 결국 숨이 멎어 죽고 말았다. 장자는 자신의 그림자가 무섭고 두려워 피해 달아나다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는 저절로 없어졌을 텐데······.”
이 우화는 불안이 두렵고 무서워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짓눌려 삶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불안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 삶에 항상 붙어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달리다가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가 불안을 떨쳐 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질식당해 삶을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자를 두려워한 남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내뱉은 장자의 철학적 메시지, 곧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가 없어졌을 것이라는 탄식 역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그 말은 불안을 경험할 때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불안 속으로 들어가면 불안이 삶을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한다. 하나는 불안을 삶의 그림자 즉,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불안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자 ‘자신의 삶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자기 삶의 그림자로 받아들이고, 불안을 만든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기 삶의 내면을 성찰해 봐야 한다.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깨닫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불안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질식시켜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안을 터득하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삶에 ‘불안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왜 자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가?”
- 쓸모없는 나무 우화에 담긴 아이러니
장자의 우화 중에는 나무를 등장시킨 우화가 적지 않은데, 흥미롭게도 이들 우화는 거의 ‘쓸모 있음’의 속박과 ‘쓸모없음’의 자유에 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목수 장석은 제나라로 가던 도중 곡원이라는 곳에서 발견한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에 심어 놓은 상수리나무를 봤다. 장석이 발견한 상수리나무는 소를 가려서 보이지 않을 만큼 굵고 컸다. 목수의 호기심이 발동한 장석이 나무의 크기를 재어 봤더니 둘레가 백 아름에, 높이는 산을 굽어 내려다볼 정도였다. 지상에서 열 길 높이나 올라간 뒤에 비로소 가지가 뻗어 있었는데, 만약 배를 만든다면 수십 척의 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나무였다. 그 때문인지 이 상수리나무 주변에는 마치 구경꾼들이 저잣거리에 몰려들 듯이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하지만 목수 장석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상수리나무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제 갈 길을 갔다. 장석의 제자는 한참 상수리나무를 구경하다가 황급히 뒤따라간 다음 스승에게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니고 나서 재목으로 이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왜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해 빨리 떠나려고 하십니까? 저의 배움과 안목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입니까?”
제자의 물음에 장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나무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 쓸모도 없는 잡목일 뿐이다. 그 나무를 목재로 사용해 배를 만들면 가라앉을 것이다. 관棺(속관)이나 곽槨(겉관)을 만들면 금방 썩을 것이다. 그릇을 만들면 금방 부서지고, 대문이나 방문을 만들면 나무의 진액이 흘러나오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어 오래가지 못한다. 정말로 쓸모가 없는 나무다. 하지만 쓸모가 없어서 베어 넘어지지 않고 이토록 거대하게 자라도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쓸모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나무와 같이 쓸모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사람들의 구속·속박과 지배·통제로부터 자유롭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권력, 부귀 또는 명성과 명예 등의 이익을 얻기 위해 대개 그것들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욕망한다. 이 때문에 장자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만을 안다고 말한 것이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역설한 장자는 실제 삶에서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를 욕망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장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장자의 재능과 식견을 이용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그를 속박하고 유혹했다. 장자의 ‘자유로운 삶’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장자 자신이 삶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끊임없는 속박에 맞서 평생에 걸쳐 싸워 가며 지켜 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장자에게 ‘쓸모 있음’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혹은 무엇인가에게) 쓸모 있는 삶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쓸모 있는 삶이다. 누군가에게(혹은 무엇인가에게) 쓸모 있는 삶이란 그 누군가가(혹은 무엇인가가) 하고 싶고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반면 자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 싶고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 ‘쓸모없음의 자유’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고 한다면, ‘쓸모 있음의 자유’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전자가 ‘거부와 부정의 자유’라면, 후자는 ‘긍정과 창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 것인가?”
- 욕망과 사랑의 방식에 관한 장자의 지혜
이 책에서는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운명, 욕망, 불안, 앎(지식), 삶과 죽음, 자유에 대해서 다룬다. 욕망과 사랑에 대해 장자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음의 우화는 『장자』 「외편」 ‘지락至樂’에 실려 있는 것으로 노나라의 임금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노나라 도성 교외의 들판에 바닷새 한 마리가 와서 머물렀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맞이해 와서 최고로 훌륭한 장소에서 술을 대접하고, 가장 듣기 좋은 음악과 제일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극진하게 대접했다. 바닷새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닷새는 눈이 어질어질해지더니 두려워하며 슬퍼하다가 한 점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한 채 지내다가 결국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진심으로 사랑해 정성을 다해 대우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닷새가 죽음을 맞게 된 까닭을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바닷새를 기르려고 했을 뿐 바닷새가 원하는 방법으로 기르지 않았다.” 이 우화는 욕망이 사랑의 감정과 방식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대개 상대방이 원하고 바라는 즉, 욕망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바라는 즉, 욕망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노나라 임금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바닷새를 사랑할 줄 알았지,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바닷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도 두지 않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연히 바닷새도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욕망하는 대상 사이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가 있다고 꿈꾸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라캉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된 모습이 실제 상대방의 모습과 일치하면, 사랑은 발생하지 않는다(혹은 식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이미 ‘충족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목이 말라 물을 갈망하는 사람이 물을 마시게 되면 곧바로 갈증이 해소되어 더 이상 물을 갈망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는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욕망이 아니게 된다는 얘기이다. 라캉의 주장은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만든 상대방의 모습’,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욕망이 꿈꾸고 상상하는 상대방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러한 까닭에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지, 욕망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 진실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에 장자의 우화 속 노나라 임금처럼, 우리의 사랑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즉 욕망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상대방도 원하고 바란다고 꿈꾸고 상상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