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전 남긴 마지막 시집 『이용악집』의 충실한 구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만나 이뤄진 한국어 시문학의 정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뤄낸 이용악의 진보적인 문학적 성취가 한국어 시문학의 어떤 정점임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쓰여진 그의 시들은 유민들의 고난한 삶을 압축된 시어들로 면밀하게, 그러면서도 감정적 울림을 주는 서사를 담아 그려내며 우리 문학계에서 독자적인 북방의 정서를 구축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생활고에 의한 소극적 친일 의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혹과는 또 다르게, 그는 어느 순간 절필을 하게 되고 이윽고 일제 경찰에 자신의 작품들을 빼앗긴 후 칩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 해방이 이뤄지자 공산주의자로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해방 정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을 한 그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 시들을 발표하게 되고, 이는 과거에 쓴 시들의 성취와 비교되며 비판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의 삶의 궤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질곡과 연동되어 복잡하게 구불거립니다. 가난과 사회적 압제와 물질적 유혹과 사상적 지향점들이 섞인 그의 개인사와, 민중의 삶을 세심한 시적 미학으로 그린 그의 시들 사이에는 거칠고 복잡했던 시대의 격랑을 그대로 맞은 사람들의 서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역사의 폭력성, 그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인간의 취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 예술의 아름다움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용악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김지하 시인은 그를 가리켜 “진짜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하며 “우리 민족의 서러움을 이토록 우아하게 담다니”라며 찬탄했을 것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던 인간 이용악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문학 예술의 정점에 도달하다
본서의 원전인 『이용악집』은 이용악이 월북하기 전 이남에 남긴 마지막 시집입니다. 1949년에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시인전집』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용악이 자신의 과거 시집들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들에 신작 시들을 덧붙여서 만든, 이용악이 직접 모은 자신의 시들의 모음집입니다. 이 책은 이후 단독으로 출간된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아직 이념적으로 치우치기 전에 완성된 모더니즘-리얼리즘 시들의 정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토록 거친 시대에는 거친 역사와 부딪치며 살면서도 민중과 서정을 놓치지 않은 작가가 쓴 시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전의 구성을 최대한 충실하게 살리는 방향성의 현대적 편집을 거쳐 출간하는 걸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악의 시들은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혼자가 아님을, 그와 같은 역사의 궤적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가 도달한 공통 정서와 서늘한 미학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강렬한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