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의 필요』: 삶의 쉼표와 빗금, 생의 깊이를 묻는 질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지윤의 두 번째 시집 『피로의 필요』는 2012년 출간하여 시와시학상(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던 시집『수인반점 왕선생』이후 13년 만에 묶는 시집이다. 200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후 선보인 김지윤의 첫 번째 시집에 대해 김남조 시인은 “등단작부터 적잖이 감탄스러운 바 있었”고 “깊고 간절한 음미와 통찰하고 관용하는 시선이 엿보였고, 시제의 다양함과 시어의 적절함 등이 이에 보태어져 촉망할 만한 신인”(추천사 중)이라고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이후 김지윤은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안정적이고 절제된 문장,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접근,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 등이 돋보”이는 “잠재력을 가진 비평가”를 만났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그간 시를 쓰는 한편 신뢰받는 평론가로서 활발히 글을 써오며 문단에 존재감을 나타내왔다.
이번 시집 「피로의 필요」 에서는 더 심화된 시인의 문학적 깊이와 확장된 사유를 만날 수 있으며, “새로운 행과 연을 위한 시작점”(「빗금으로부터」)을 엿볼 수 있다.
표제시 「피로의 필요」에서 ‘피로’는 삶의 소모적 부산물이 아니라, 멈추어야 할 순간을 가르쳐주며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성을 다시 묻는 자리로 확장된다. 이 시에서 피로는 존재의 내면을 파고드는 성찰의 도구,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며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고 사색을 위한 어두운 방을 제공하고, 삶의 다른 국면을 열어주는 중요한 고비, 생의 문장 속에서 문득 등장하는 쉼표, 그리고 질문의 시작점과 같은 거죠.”(「현대시」 2025. 1,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대담 중)라는 시인의 말처럼, 피로가 만들어 준 여백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시집『피로의 필요』는 생과 죽음, 기억과 망각, 빛과 어둠 사이를 가로지르는 성찰적 시선을 드러낸다.
“김지윤의 시적 주체는 잊힌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매이길 자처한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잊힌 기억들을 불러내 그 시간과 존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고자 한다.”(이경수 문학평론가, 시집 해설 중)는 말처럼 이번 시집은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와 공기를 지니고 있”는 시적 시간을 체험하게 해주는 시들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모든 구석과 변두리에 주목한다. “라디오에서 틀어주지 않는 희망곡”(「B-side」)처럼 잊혀진 삶의 의미를 발굴하며, 세상의 모든 존재가 지닌 고유한 가치에 애정을 보낸다. 이는 생명이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 대한 깊은 경외로 확장된다. 이 시집의 몇몇 시들은 기후 위기라는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응시를 보여주기도 한다.
앞의 대담에서 최진석 문학평론가는 「작별」이 “겨울은/12월과 1월이 모두 있는 계절/하나가 죽어야 새로운 하나가 태어난다면/추워야 마땅한 일이다”에서 출발해 “빙점은 물이 얼기 시작하는 온도이면서/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온도이기도 하다는 걸/한 시절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해할 수 있다”라는 구절로 이어지며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다 결국 다다르게 된 “생명에 대한 역설적 통찰”에 주목했다. “삶도 죽음도 분리된 실체 같은 것이라기보다 한 쪽 면이 다른 한 쪽 면과 맞닿은 채 공존하는 존재의 상태”라는 생각이 김지윤의 시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피로의 필요』는 제주 4·3 등 역사적 비극을 다룬 시들은 과거의 고통을 현재로 소환하며, 잊혀가는 상흔과 애도되지 못한 죽음을 시적 언어로 복원한다.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른다”(「봄」)고 표현하는 역사적 시간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잃어버린 공감과 연대를 회복하려는 시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화음」)내야 한다는 절실한 목소리가 김지윤의 시에는 깃들어 있다.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 (「스미는 숨」)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 시집에는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으며 존재의 여러 면을 모두 바라보려 하는 다면적 사유가 돋보인다. “시는 고정된 해석과 정답을 지양하고, 서로 다른 가능성을 동시에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 세계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고, 삶이란 본디 복잡하고 다층적이기에 시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앞의 대담 중 시인의 말)한다는 관점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눈을 크게 뜨고,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세계를 힘껏 응시한다. 이경수 평론가의 말처럼 “빗금은/ 새로운 행과 연이 시작되는 지점”이자 시인이 생각하는 ‘시가 시작되는 곳’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빗줄기는 사선을 그리며 내리고/ 별들은 기울어지며 흐르”고 “넝쿨은 비스듬히 타올라 담장을 넘”는다. 대단히 불온하고 전복적인 시선은 아니지만 조금 삐딱하게 비스듬히 바라보는 세상은 담장을 넘는 생명력을 품을 줄 안다. “새로운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서”자 다른 세상이 열린 셈이다. 김지윤이 꿈꾸는 시는 아마도 이런 힘을 지닌 시일 것이다. (이경수, 시집 해설 중)
정재훈 평론가는 빗금이 기존의 문장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그어지므로 “빗금 아래의 기존 문장은 새로운 문장을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고 「빗금으로부터」의 빗금은 “모르는 세계의 첫 언어”와 “낯선 질문”이 출현하게 하는 계기라 평하기도 했다.
시인은 마침표를 원치 않는다. “마침표를 손끝으로 오래 만져 닳게 해야지”(라스트 컷」)라고 끝없이 중얼거린다. 마침표 대신, 그는 쉼표나 빗금을 긋는다. 정재훈 평론가가 「빗금으로부터」를 평하며 “빗금이 그어졌다고 해서 기존의 문장이 완전히 지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빗금 아래의 기존 문장은 새로운 문장을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라고 했듯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게, 새로운 문장이 탄생되도록 말이다.
“빗금이란 나누는 힘이면서 가까워지게 하는 힘”이며, “빗금을 긋는 행위가 뭔가를 나눈다고 생각하면서 실은 두 개념을 맞대어두는 일”이라고 읽는 통찰을 보여준 박다솜 평론가는 김지윤의 작품에 “비평처럼 예리한 시와 시적 비평이 가능해지는 어떤 빗금의 존재”가 깃들어있다고 본다. 그것은 ‘꿈’과 ‘삶’이 맞닿아있는 빗금이기도 하다. 이는 박다솜의 표현처럼 “(꿈과 삶) 둘 모두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 즉 ‘나로 존재한다는 것’의 문제가 된다.” (박다솜, 「빗금으로부터 빗금에게로」, 「현대시」 2025. 1 중) 김지윤의 시는 이 문제를 여러 방면에서 치열하게 탐구한다.
신철규 시인은 이 시집을 읽으며 “묵묵히 먼 길 따라오다가/ 문득, 자기 발걸음 소리를 듣게 하는 것”(「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을 생각한다.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제야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된다. 뒤에서 따라오던 소리가 자신의 뒤꿈치에 달라붙을 때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가 울리는 소리와 나의 안에서 울리는 소리들이 겹쳐질 때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들리면서도 안 들리는 척했던, 보이면서도 눈앞에 없는 것처럼 여겼던 것들과 대면할 수 있다.”(신철규, 추천사 「빗금처럼, 스미는」 중)는 것이다.
김지윤의 시는 이처럼 쉼표 속에 머무르면서 비로소 바라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야가 열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날이 밝을 것 같지 않은 어둠 속에 스며드는 희박한 새벽빛과 “세상의 모든 소음” 속에서 돋아나는 희미한 소리에 집중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 잊혀지고 지워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질문과 사유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여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당신을 ‘다음 시작’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