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절임을 만드는 삶과의 작별
감각과 사고가 반복되는 인물에게 안겨주는 새로운 어조
작가는 변증법론자가 아니다! 이것이 문학과 정치 혹은 문학과 철학의 차이다. 뚜렷한 인과관계와 결말을 설정하지 않고, 창문은 늘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인과관계로 꽉 짜인 소설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간과 역사,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라면 미래에 대해 냉소하는 법 없이 체호프처럼 물어야 한다. 이를테면 「산다는 것은」의 클레오파트라는 개인적 유혹이나 쾌락을 뛰어넘어 냉소적 논리를 부수고 삶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그녀가 실현하는 사랑은 오이절임을 만드는 데 구속받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삶 전체와 작별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독자가 동일한 중심축을 향하여 형성되는 사랑의 에피소드에서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한순간을 포착해낸다. 특히 선택에 직면한 두 주인공을 묘사할 때 ‘그러나’라는 접속사 대신 ‘그리고’를 쓴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는 대립인 반면, ‘그리고’는 앞엣것이 뒤로 연장되며 희망과 불확실성 속에서 시간이 자유를 향해 열려 있음을 암시한다. 랑시에르는 “확실한 삶이 아직 멀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끈기 있게 새로운 시작을 추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체호프 소설 속에서는 ‘민요의 시간’이 두드러진다. 그는 이 선율 속에 감각, 감정, 권태, 기대, 향수, 꿈을 응축시켜 감정을 자아내면서 직선의 시간 속에서 틈입을 만들어낸다. 가령 「나의 인생」의 주인공 루치나는 불행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독자들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행동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 체호프는 그녀에게 “슬픔이 중대하다”는 문장을 안겨줌으로써 글이 음악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이 쫓는 것은 체호프 소설 속 주인공들이 먼 곳에 있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불행한 근본 원인은 예속 때문인데, 예속은 감각과 사고를 계속 재생산한다.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작가의 임무란 사람들이 감각하고 느끼는 “정서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학생」에서 눈물과 기쁨이 교차하는 서사가 바로 이런 변화를 이뤄낸다. 그것은 감정의 직접적 드러냄보다 묘사로 나타나는데, 즉 부서지는 빛, 사각대는 낙엽, 환상의 구름, 갈대숲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랑시에르는 자연에 대한 체호프의 깊은 애착이 민중을 외면하다기보다 오히려 그 고통을 직시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텝』이 한 가지 예시다. 이 소설에 대해 일부 비평가가 ‘멈춰 있다’ ‘무심하다’라는 비판을 가하자 랑시에르는 ‘사람들이 감각적 사건을 경험하는 여정이 어조를 확립시키고, 이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며 맞선다.
혁명가들은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겠다고 외치지만, 이것은 추상적이다. 체호프는 문을 쾅쾅 두드리듯 큰소리로 외치지 않은 채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어디서나 울리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스텝』 속 해오라기의 소리로 무심함을 드러내면서 매 순간 삶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만든다.
체호프는 새로운 삶의 부름에 응답할지에 대해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이 한발 내딛기만 하면 삶이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약혼녀」의 나자가 새로운 선택을 하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무언가’와 ‘아무것도 아님’ 사이에서 경계를 따라 나가는 여정에 함께해준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감각을 분위기로 드러내고, 주변의 자연 풍광들로 표현한다. 그 안에 시대와 삶의 방식을 응축한 하나의 총체적 현실이 담겨 있다. 랑시에르는 “자유에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 체호프 작품의 탁월성이라고 평가하며, 이것이 바로 “문학의 정치”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