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왜 이 희곡을 썼나?
이 작품을 초연하고(1906년) 서문과 함께 출판하던(1911년) 무렵 쇼는 이미 삶의 절반 너머를 살았다. 스무 살 청년이 아일랜드를 떠나(1876년) 이곳 런던에 온 지는 30년도 더 지났다. 그동안 그는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보단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게 낫다고 보고 열심히 달려 왔다. 직장인으로서나 소설가로서나 정치인으로서 실패도 경험했지만 문필가로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극작가로서는 입센의 정신을 잇고 장차 셰익스피어를 능가한다는 자신감을 갖추기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그가 이러한 활동을 해 나가도록 사상적 자양분을 공급한 곳은 페이비언 협회다. 그가 점진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 단체를 창립한(1884년) 건 아니지만, 창립하던 해에 가입하여 이걸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읽었으며,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사상의 기반을 다지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 성과는 곧 드러났다. 먼저 그는 1895년 런던 정경대(LSPE)를 공동 설립했다. 쇼와 그의 동료들은 기존의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연구하는 주된 동기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데 있지,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이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지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런 연구와 교육을 수행할 기관을 몸소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1898년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essays in Socialism, 고세훈 역, 아카넷, 2006)’의 초판본 서문과 한 장인 ‘사회민주주의로의 이행’도 썼으며, 1900년에는 ‘페이비어니즘과 제국(Fabianism and the Empire: A Manifesto by the Fabian Society)’이란 책을 편집하고 서문을 썼다. 더 나아가 페이비언 협회는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 LRC)에 참여했는데 이 위원회가 1906년 노동당으로 정식 개명했으니, 이제는 학술단체의 범위를 넘어 영국의 주요 정당의 창당에 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정치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당이 집권당이 되기까지는 몇 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는 정치에 관해서 말하고 글 쓰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1897년부터 런던 세인트팬크라스의 교구위원과 자치구의원으로 도합 6년 반을 일하며 예결산 수지를 맞추느라 눈에 피로를 느낄 정도로 숫자를 들여다보던 시절도 거쳤다. 비록 간접선출의 형식으로 맡게 된 공직이지만 말이다. 이 직책의 연임을 위해 나선 1904년 선거에서 낙선도 경험했다. 하지만 별로 아프진 않았다. 그에게는 정치 말고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희곡작가로서의 일이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특히 ‘악마의 제자’의 성공(1897년)으로 금전적 고민은 영원히 사라졌다. 게다가 1898년에는 자기보다 12배 이상의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샬롯 페인 타운셴드와 결혼도 했다.
이제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들여다보자.
‘1906년 늦은 여름 그랑비 바커(연극배우 겸 제작자로서 쇼의 여러 작품을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가 새 작품을 종용하러 쇼를 찾았을 때, 쇼는 아내와 콘월의 메비지시(Mevagissey)에 머물고 있었다. 수영을 무척 좋아했던 쇼는 매일 아침을 바다에서 보냈고 차기작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쇼 부인이 다음과 같은 기억을 일깨우기 전까지는. 쇼가 저명한 외과의사 암로스 라이트 경과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암로스 라이트 경에게 조수 한 명이 다가오더니, 새로운 옵소닌 치료법을 적용할 환자 모집단에 결핵 환자 한 명만 더 받아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기에, 암로스 라이트 경은 물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순간, 쇼는 그 상황에 연극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고 부인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까먹고 있다가 메비지시에서 부인 덕에 다시 생각난 것이다. 그 주제라면 윌리엄 아처(연극 비평가)가 제기한 도전에 응할 수 있었다. 아처는 무대에서 죽음을 얘기하기 전까지는 쇼를 최고의 극작가 반열에 올리기 어렵다고 평했다. 그래서 쇼는 의사와 죽음에 관한 비극을 쓰되,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작품을 쓰기로 했다(버나드 쇼-지성의 연대기, 헤스케드 피어슨 저, 김지연 역, 뗀데데로, 2016).’
이렇게 시작한 이 연극을 끌어가기 위해 작가는 주요 인물로 6명의 의사와, 타락한 화가 루이스 두비댓과 그의 매력적인 부인 제니퍼 두비댓을 등장시킨다. 먼저 콜렌조 리전(콜리 경)은 창작의 계기를 열어준 암로스 라이트 경을 모델로 한 의사로서, 옵소닌 방법을 발견한 공로로 극의 앞부분에서 기사작위를 받는다. 그에게는 이미 열 명의 결핵환자가 있어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원으로는 더 이상의 환자를 받기가 어려운 처지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두 환자가 나타난다. 화가 루이스와, 리전의 동료 의사다. 화가는 뛰어난 예술가이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락한 반면, 동료는 도덕적으론 나무랄 데가 없지만 의사로선 무능하다. 환자 하나를 더 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도대체 누굴 살리는 게 더 나으냐가 리전의 딜레마다. 그에게는 자신보다 20년 이상 연장인 멘토가 있다. 이 노인은 리전을 자식처럼 아끼며 북돋아 주는 의사로서 리전이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세 번째 의사는 독일계 유대인 의사다. 그는 ‘치료보장’이란 과대광고를 내걸고 개업하여 나름 성공하곤 은퇴했다. 네 번째는 환자의 ‘쓸모없는’ 장기를 떼어 주는 쓸모없는 수술을 유행시켜 성공한 외과의사다. 다섯 번째는 성공에 눈이 멀어 환자의 치료에 치밀함을 희생시키길 망설이지 않는 내과의다. 마지막이 리전의 딜레마에 등장하는, 선량하지만 무능력하고 아픈 의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 모두는 작가가 실제 의사들과 개인적으로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가공해낸 인물들이란 점이다. 쇼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개성과 대사 하나까지 상상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주로 자신의 삶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장면에서 골라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게 바로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성격과 대사가 관객에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피어슨이 쓴 쇼의 전기를 더 읽어 보자.
‘그리하여 ‘의사의 딜레마’를 쓸 때 그는 당대 최고 의사들의 면면을 극에 녹여 낼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은 배꼽 빠지게 재미있었다. ‘두비댓’이라는 예술가는 여러 사람이 투영된 인물로, 돈을 빌리는 성향은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연인이었던) 에드워드 에이블링을 참조한 것이었다.’
엘레노어 마르크스(1855-1898)는 칼 마르크스(1818-1883)의 막내딸로서 대영박물관 필경사로 일하던 시절, 이 박물관의 도서실에서 ‘자본론’을 읽던 쇼의 관심을 끌게 된 아가씨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르익기 전에 경쟁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가로챘다. 에드워드 에이블링이 엘레노어와 같이 살기로 합의했을 때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지만 아내를 버린 상태였다. 나중에 에이블링의 부인이 죽자 사람들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에이블링 커플이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에이블링은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몰래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레노어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극 중에서 리전의 멘토인 노인이 ‘한 남자의 돈 문제와 여자문제에 대한 평판을 알기 전에는 그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가지 모두에서 하자가 있었던 에이블링이야말로 루이스 두비댓의 모델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극에서는 리전의 집에서 일하는 조수 레드페니가 ‘병원에서 우린 선생님을 구닥다리 콜리 리전이라고 부릅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병원에서 자기 스승을 ‘구닥다리 암로스 라이트’라고 불렀을 만한 인물로는 알렉산더 플레밍이 있다.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1차 대전 당시 영국군은 라이트에게 ‘상처감염’을 줄일 방법을 개발하라는 임무를 맡겼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상처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감염을 치료하는 항생제를 만들려는 시도에 매우 회의적이었으며 사사건건 반대했다고 한다. 이러한 스승의 조수 생활을 하던 플레밍이 결국 1928년 페니실린이란 항생물질을 발견해 냈다.
이 풍자적 비극에 희극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보태 준 인물은 리전의 하녀 에미다. 극의 주요인물이랄 순 없는 그녀는, 리전보다는 몇 살은 위로 보이고 말투로 보아 리전을 어려서부터 보모로서 돌봐온 걸로 보인다. 그녀는, 바빠서 상담할 수 없다는 리전을 달래어 제니퍼와 면담하도록 설득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리전이 자신의 기사서훈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의사들에 둘러싸여 하염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는 모습에, 결국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불쌍한 환자들과 함께해야 할 의사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한다’고 일갈하고는 의사들을 집에서 내쫓는다. ‘돈키호테’로 치자면 산초 판사요, ‘춘향전’으로 치자면 방자 같은 인물을 좋아하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쇼가 이렇게 공들여 쓴 이 희곡은 1906년 11월 20일 초연 이래 수준 높은 관객을 동원하며 6주 동안 상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평론가들로부터 칭찬만 들은 건 아니었다. 평론가들은 루이스 두비댓이 사도신경을 흉내 내어 ‘저는 미켈란젤로와 벨라스케스, 렘브란트를 믿사옵고’라는 신조를 내뱉고 죽는 장면에 대해서는 취향이 형편없다며 쇼를 비난했다. 게다가 윌리엄 아처도 ‘쇼가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는 데 실패했다’고 불평했으며 작가는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