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시-LIM 시인선’의 첫 번째 시집은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다. 2022년 ≪조선일보≫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고선경 시인은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통해 “구겨진 뒤축 같은 오늘을 딛고 끝내 내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는” 씩씩함과 유쾌함으로 첫 시집 출간 한 달도 채 안 되어 중쇄를 찍는 등 많은 독자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그런 고선경 시인은 이번 신작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서 날카로운 유머와 재미, 솔직한 고백 속에서 빛나는 진심, 용기와 사랑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한층 더 깊어진 마음을 전한다. 추위 속에서 오래 끓여 진하게 우러난 맛과 향을 담아,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과도 같은 선명한 실감으로. 시인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로 함께 살아서 나눌 수 있었던 아름다움과 축복을 건넨다. 이렇게 고선경 시인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쥐고, 끝과 시작을, 과거와 미래를 횡단하며 기억의 시간을 뜨”(소유정 문학 평론가, 해설 중에서)며 앞으로도 자신의 궤적을 착실히 만들어 갈 것이다.
해설 | 크로셰 메모리 (소유정 문학평론가)
고선경의 첫 시집을 떠올리며 이 시집을 읽었다면 어딘가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챘을 테다. 『샤워젤과 소다수』의 대표 이미지가 무한한 기포를 가진 소다수와 같이 청량하고 시원한 것이었다면,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서는 “씁쓸한 시나몬 향”(「카푸치노 감정」)이 가미된 커피나 오래 끓인 “어두운 술”(「뱅 쇼 러브」)처럼 높은 온도와 입안에 남는 맛을 가진 종류의 이미지가 돋보인다. 끈적이지 않고 휘발되는 산뜻함이 아니라 오래 남는 맛과 향은 시적 주체에게 남은 어떤 것을 환기시킨다.
잔을 모두 비운 후에도, 시가 끝난 후에도 남아 있는 맛과 향은 ‘나’에게 남아 있는 이전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고선경은 지금 곁에 없지만 ‘있었던’ 존재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며 기억하기를 반복한다. 이는 기억해야만 하는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각인하는 방식이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시적 주체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기억이다. 기억하면서 그리워하고, 기억하면서 기대하고, 기억하면서 기다리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애도의 과정이다. 애도의 수행은 대상이 되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나’를 위한 일이다.
고선경은 털실 하나를 들고 한 코를 뜬다. 앞으로 나아가는 한 코, 한 코의 움직임은 그것이 더 이상 털실이 아닌 털실로 만든 무엇일 시간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향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끄트머리를 쥐고 다시 한 코, 한 코를 풀어 나간다. 틀렸거나 코를 빠뜨리지 않았음에도 부러 실이 만든 길을 되짚는다. 기억하려는 사람의 자세로 엉키거나 매듭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어느 때엔 온 길이 아득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꿈인지 상상인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모두 발생한 사건으로 유효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모습대로 동그랗게 감긴 털실 하나가 있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 시인의 손 안에 있다. “다시 코바늘을 쥐고 미래를 떴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털실로 뜬 시계」) 중얼거리며 한 코를 만드는 사람. 끝과 시작을, 과거와 미래를 횡단하며 기억의 시간을 뜨는 고선경의 시는 앞으로도 자신의 궤적을 착실히 만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