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 자신에게는 매일 지면서 타인을 이기려고만 한다.”
: 나를 먼저 설득하는 그라시안의 수사학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수사학은 정치 지망생들의 필수 과목이었다. 수사학이 개인 또는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뜻과 의도를 관철하는 웅변술이었기 때문이다. 토론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이 최고의 능력자였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 수사학은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미사여구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때를 맞추어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개인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매체는 웅변이 아니라 글이 되었고, 수사학은 웅변의 영역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상대를 설득하는 실용성을 담보로 하던 수사학이 예술의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수사학이 문학의 예술성을 치장하는 도구로 활용되던 1600년대에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고대 그리스 수사학이 지닌 원래 성격을 글에 도입하여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문(美文)과 현학적인 표현으로 인해 지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대중으로부터 괴리된 채 엘리트의 문화로만 향유되던 ‘글’에 ‘직접 화법’을 이식함으로써 독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수사학이 설득하는 대상이 타인이었던 반면 그라시안 수사학이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은 ‘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에게 등을 돌린 대상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라시안은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차라리 나를 더 단단하게 무장하는 것이 이롭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그라시안이 주구장창 이기적 노선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태생적인 인간의 단점을 극복하고 주변 환경에 지배되려는 나를 바로 세우며 타자와 나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할 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고 갖가지 위기와 위협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가르친다.
ㆍ 계획대로만 살아가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계획에 갇히게 된다.
ㆍ 사람들은 실수에 대해서는 오래 기억하지 않지만, 실수를 저지른 이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는 쉽게 잊지 않는다.
ㆍ 욕심은 돈을 가져오고, 사치는 쾌락을 느끼게 하며, 교만은 명예를 맛보게 하고, 게걸스러움은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누리게 하고, 게으름은 휴식을 준다. 하지만 화는 어떤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로지 상처와 충격과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ㆍ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천박하고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 그의 인격과 품위는 천박하고 상스러운 수준으로 떨어진다. 반면에 머리에 든 것이 없고 품행이 가벼운 사람이라도 고상한 말을 쓰면 그의 인격과 품위가 고상해진다.
ㆍ 그 사람의 인격을 알고 싶다면 그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
ㆍ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시간은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고 모든 겉치레를 벗겨내어 본질을 보여준다.
그라시안의 조언은 때때로 세상에 유통되는 도덕과 배치되고는 한다. 그 이유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도덕과 윤리 가운데 많은 것이 지배자의 통치 원리에서 파생한 까닭이다. 또한 순간적인 상황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방법과 세상의 이치가 우리의 삶에 작동하는 방식에서 대해서 알려준다. 이로 인해 독자들께서는 세상일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명확하게 와닿지 않던 많은 부분이 선명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가슴에 품고 다니며 가끔씩 꺼내어볼 인생의 문장들”
: 현대인의 삶에 나침반이 되는 세속적 지혜의 경구
최근 들어 훌륭한 문장을 베껴 쓰는 필사 노트 종류의 책이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우리나라의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엘리트 계층의 처참한 국어 수준에 대한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와 어른이 사라진 시대에 훌륭하고 뛰어난 생각이 담긴 과거의 문장을 대하며 불안함과 허전함을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위인 대부분은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경구와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삶의 여러 갈래 길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들은 그 오랜 경구와 문장을 꺼내 길을 물었다.
감히 독자에게 이 책을 내민다. 옮긴이 송병선이 그라시안의 저작들에 실린 글 가운데 가려 뽑은 지혜의 정수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쇼펜하우어는 그라시안의 책을 두고 “평생 가지고 다니며 읽어야 할 인생의 동반자”라고 했고, 니체는 “이처럼 세련되고 정교한 인생 지침을 이제껏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철학 세계에서 괴팍하고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두 인물이 스승으로 모시고 지침으로 삼았다는 점은 그만큼 그라시안의 가르침이 비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400년 넘게 이어져온 그라시안의 글과, 그 지혜의 정수를 담은 이 책은 책으로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삶의 고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