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밀림을 호령한 한국 호랑이, ‘위대한 왕’
‘위대한 왕’은 신령스러운 백두산 호랑이의 후예로 태어나 만주의 거대한 숲의 바다[樹海]를 지배하는 군주로 성장한다. 이 호랑이는 광활한 숲의 왕자(王者)이자 준엄한 자연 법칙의 현현이기에 타이가의 모든 동물들은 왕에게 복종한다. 특히 인간들은 위대한 왕을 산의 신령으로 모시며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왕은 굴종을 모르는 순수한 자연의 힘과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밀림의 법칙을 대변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왕이 경외심을 느끼는 대상은 오직 타이가의 현자 퉁리 노인뿐이다. 그러나 철도로 상징되는 무자비한 문명이 만주 타이가를 송두리째 파괴하기 시작하자, 왕을 비롯한 숲의 터줏대감들은 새로이 등장한 인간에 맞서 반격에 나서는데…….
사라진 우리의 호랑이, 그리고 만주의 고통스러운 역사
『위대한 왕』은 무엇보다 절제된 문장과 밀도 있는 구성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난 세기의 사라져 간 밀림과 한반도에서는 멸종되어 버린 한국 호랑이 이야기는 신화와도 같은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또한 다양한 동물과 식생, 원주민들의 풍속에 대한 묘사는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요로운 세계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역사적 함의이다. 니콜라이 바이코프가 이 작품을 쓰던 때는 러시아가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을 획득하여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이자 한반도를 식민화한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던 때이다. 따라서 ‘번쩍이는 금속 용’(기차)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침략에 대항하는 ‘위대한 왕’과 숲의 동물들은 인간의 발아래 상처 입고 쓰러져간 자연을 상징할 뿐 아니라, 식민자들에게 침탈당한 피식민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작품 후반, 호랑이들의 비극적 최후를 따라가는 독서가 주는 비장함과 가슴속 깊은 통증은 분명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왕』은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된 대자연을 향한 만가(輓歌)이자 파괴와 전쟁으로 점철된 이 땅의 20세기 역사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고독한 망명자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위대한 왕』의 독창성과 뛰어난 작품성은 저자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이력에서 비롯된다. 바이코프는 제정 러시아의 장교로서 러시아의 동청철도 수비대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는 만주의 원시 밀림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한다. 그리고 30여 년을 만주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만주 밀림의 동식물과 원주민 생활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담은 여러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중 『위대한 왕』은 1936년 〈만주일일신문〉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연재되다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생생한 밀림 체험과 완성도 높은 구성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저자가 직접 그린 38점의 생생한 삽화
국내에 처음 완역되어 소개되는 『위대한 왕』에는 식물학자나 동물학자에 버금가는 저자 바이코프의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삽화들이 실려 있다. 그의 그림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만주 타이가의 웅장한 자연과, ‘위대한 왕’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 그리고 다양한 동물들을 꼼꼼한 스케치로 그려낸 것이다. 호랑이뿐만 아니라 멧돼지, 곰, 산양, 담비, 사슴, 산꿩이나 까치를 비롯한 각종 새들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밀림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마치 사진처럼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섬세하고도 힘 있는 그의 그림을 통해 만주의 대자연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위대한 왕』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재일 지식인 서경식 선생의 발문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던 고(故) 서경식 선생은 『위대한 왕』을 스스럼없이 ‘내 인생의 애독서’로 꼽았다. 이 책에 붙인 발문에서 그는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식민과 피식민의 어지러운 역사를 세밀하게 읽어내고, 재일조선인 2세로서 겪은 개인적 경험, 『위대한 왕』과의 깊은 인연 등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냄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한층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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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올라 산 정상에서 조망해 보니, 사방에 펼쳐져 보이는 산록평야는 어두컴컴한 바다처럼 광대하면서도 울창한 숲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이 숲의 바다를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던 호랑이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인간들이 그어놓은 국경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선에서 만주로, 더 나아가 극동러시아로 자유롭게 유유히 활보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
바이코프의 작품 세계는 지리적으로는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공간적 확장을, 시간적으로는 19세기 말 열강들의 아시아침략에서 사회주의혁명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시간적 척도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은 뛰어난 문학 작품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텍스트 읽기와 컨텍스트 읽기라는 두 가지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서경식 - 〈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