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는 대상에 천천히 다가가기에 한 조망자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 그리고 시적 발화로서 사랑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 나아가 시인의 스토리를 시적 배경에 깔아놓는다는 점, 그리고 생태 주체에 대한 위협을 호소하는 그 경향성의 표출 등을 들 수 있겠다. 그의 목소리는 대상의 외로움에 값한 듯하지만, 사실 독자 몫을 대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독자에게 간절하게 전달하려는 그 수순을 확인하며 읽을 수 있었다.
무릇 시는 체험의 결과이다. 그러나 체험이 바로 시가 되는 건 드문 일이다. 어쩌면 추체험 즉 체험이 누적되어야 이루어지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쌓인 체험들이 헛간의 퇴비처럼 발효될 때, 그래서 붉은 토양을 회복시킬 검은 흙거름이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시의 종자를 파종하여 튼튼히 기를 시기가 오는 법이다. 이는 일찍이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선생이 강조한 〈체험-경험-징험徵驗〉의 과정을 거쳐 글이 생성된다는 맥락과도 같다. 체험이라는 원적토에 이 발효의 거름을 주어 싱징성이라는 촉촉한 시의 나무를 가꾸어가는 게 일련의 창작 과정이다. 독자에 따라 산만하다 할 듯도 싶겠으나, 기실 시의 구성이란 이리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이 준비하고 기획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구조를 바로 시가 그처럼 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살려 앞으로 ‘체험’과 ‘경험’을 살려 이를 종합하는 ‘징험’의 경지에 이른다면 바야흐로 좋은 시가 보이고 또 이를 좇아 시를 빚을 수 있을 것이다._ 노창수 시인,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