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은 고리타분하지 않다. 마음 들키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는, 한 세계가 내게로 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안다. 송림동으로 보면 최적의 시인을 만난 것이다. 현대에 밀려 송림동의 근대는 저물어 가지만, 최종천의 시들이 있어 완전히 바래진 않을 것 같다. 당장 나만 해도 익숙한 듯 낯선 이 공간에서 오랜 시간 흥겹게 머물렀다. 공간의 필법이 공감이라는 뜻한 바를 이루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정우영, 해설 「공간이 시를 불러 말하길,」 중에서
송림동의 골목은 특이한 점이 있다.
막다른 골목이 많고, 돌아오면 바로 그 골목
골목이 골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미로보다 더 미로 같은 골목은
서로의 그림자처럼 곁에 서서
같이 걸어주고 서로 어깨를 걸고 있다.
덩치 작은 못난 집끼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지금 막 들어선 이 사람 어딜 갈까?
알아맞히기라도 하는 눈치다.
이 많은 골목들과 정이 들려면
어슬렁어슬렁 걷는 강아지의
꽁무니라도 따라다닐까 보다
_「골목이 골목을 물고」 부분
표제작인 「골목이 골목을 물고」는 송림동이라는 동네에 존재하던 사람과 사물들이 어째서 살아 숨 쉬듯 펄떡이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미 골목 차제가 “골목이 골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로 같은” 골목들은 서로 어깨도 걸기도 하며, 골목을 이루고 있는 “덩치 작은 못난 집끼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산다. 그래서 낯선 누군가가 골목에 들어서면 “이 사람 어딜 갈까?” 서로 “알아맞히기라도 하는 눈치다.” 골목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이니 당연히 송림동 골목에서 존재했던 존재들이 모두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골목에도 찾아오는 필멸의 그림자가 있으니 “세월은 할 일이 없어 늙어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심심해서 늙는다.” 그런데 이 필멸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필멸이다. 왜냐면 송림동 골목은 “가난한 동네”(이상 「골목이 골목을 물고」)이기 때문이다. 즉 도시에서 생산된 가치와 부는 송림동 골목으로 되먹임되지 않고 송림동 골목을 집어삼켰다.
감상도 연민도 없이 골목이 되다
‘부동산에 미친 나라’ 대한민국은 살아 숨 쉬는 송림동 골목을 포클레인의 먹성을 앞세워 해체해버렸다. 그래서 너도나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짧지 않았던 해체의 과정을 최종천 시인이 세밀하게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큐멘터리식으로 하지만 단지 고발이 아니라 생명력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무너지고 있는 담으로 둘러싸인
측백나무에 덩굴이 얽혀 있는
햇빛이 잘 들이치는 이곳
엄마 아빠에게 야단맞은 아이가
조용히 훌쩍이기 좋은 곳이다.
부부싸움에 박살난 것 같은
그릇 조각들이 햇빛에 눈을 부릅뜨고는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다.
_「자그마한 공터」 부분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돌아가는 바람이 참 싱그럽다./ 가난한 동네에 아이들이 많다고 하던데,/ 이곳 송림동은 가난한 동네는 아닌 듯하다.” 아이들이 많아서 가난한 동네가 아니라는 이 진술은 역설(paradoxa)이다. 사실 “아이가/ 조용히 훌쩍이기 좋은 곳”이지만 지금은 “돌아가는 바람이 참 싱그”러울 뿐이다. 아이들이 없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최종천 시인은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남루들을 숨기지 않는다. 남루마저 삶의 단면이기에 그럴 것인데, 늙어감만 있고 아이들은 없는 가난한 동네이기에 그 남루는 너무도 쉽게 눈에 띄게 마련이다. 하지만 최종천 시인은 섣부른 감상에 빠지지도 않고 연민을 통해 자기 우월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그 자신이 송림동 골목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떼어 팔아 준 주인 할머니 보일러도
결국에는 도둑질이었다는 것.
나는 그 보일러 떼어 팔아 주고 주인 할머니
7만 원 내가 3만 원을 챙겼다.
유성철물설비 집에서 몽키와 스패너를 빌려 썼다.
_「유성철물설비」 부분
재개발 과정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물건을 떼어다가 팔아먹은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고백하면서, 그 도둑질에 ‘유성철물설비’도 어차피 공범이라는 유머는 시적 화자가 송림동 골목에 사는 다른 존재들과 “서로 어깨를 걸고”(「골목이 골목을 물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너스레다.
최종천 시인의 이번 시집은 ‘부동산에 미친’ 천민적인 대한민국 자본주의에 대한 직격이면서도 시인이 먼저 분개하거나 시인 자신을 순결한 영역에 두지 않으려는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가 이룬 드문 성취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생황에 복무할 때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