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여성 관점’이다. 수천 년간 철학은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을 통해 수행되어 왔고, 참된 진리는 명료한 정신과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반해 경험적인 것, 감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생성과 소멸의 과정 안에 놓여 있는 것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철학의 이러한 높은 이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여성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원초적으로 비철학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여성이 경험하는 임신과 출산은 그녀들을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깊숙히 매이게 했고, 생활의 온갖 잡스러운 냄새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여성은 순수함, 추상성, 정신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국가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등을 논하는 것은 육신적 조건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수천 년간 여성들도 매일매일의 삶을 영위했을 텐데 지성의 역사에서 그들의 존재는 거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여성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여성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바깥에서 들여다볼 거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전해진 지식, 합리성, 도덕은 누구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그 관점은 참으로 참으로 공평무사한 것인가? 보편적 진리, 보편적 관점이라는 것이 진정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지 않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여성 관점을 구축하여 대안적 지식과 도덕, 합리성과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13쪽)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문제로 여기지도 않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풀어야 할 문제로 떠올랐다.
이 책은 어떤 지식이나 진리도 특정 관점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실상 우리의 인식과 판단 대부분은 가치 함축적이며, 그런 한 어떤 것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가 어떤 관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관점으로부터 독립된 진리 자체를 찾으려 헛되이 노력하기보다는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관점, 어떤 문화적 규범 및 실천과 연계된 것인지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이다”(20쪽)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의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여성 관점은 기존의 지배 담론에서 이성의 이름으로 배제되어 온 문제들, 가령 신체성, 구체성, 우연성, 주관의 편향성, 감정적인 것, 일상성, 관계를 통한 유대 등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철학은 저 멀리에서 빛나는 수정처럼 맑고 단단한 지식의 결정체가 아니라, 끈적거리고 냄새 나는 삶의 현장 안으로 그것 스스로 현실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되었다.”(98쪽)
이렇듯 이 책의 주된 관심은 관점의 전환이 지니는 함축이다. 그리하여 1부에서는 먼저 여성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 여성주의 인식론이 어떻게 전개되고 분화되었는지를 논의한다. 서구 여성주의 인식론은 크게 경험론, 입장론, 포스트모던 여성주의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는데, 각각에 대해 살펴본 다음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음양이라는 개념 틀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서구의 여성주의 인식론과 차별되는 대안적 인식론을 제시한다. 2부에서는 여성 관점과 불가분적으로 맞물려 있는 여성 주체의 형성을 다룬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철학사에서 어떻게 나타났고, 칸트 철학의 주체 개념을 활용해 여성 주체의 형성을 설명한다. 3부에서는 주로 공적 영역에 치중된 기존의 정의론을 여성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이제껏 정의론 안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가족 내 권력 관계와 분배의 문제를 다룬다. 이로써 추상적이고 원리적인 정의론 대신 삶의 냄새가 배인 정의론을 새롭게 모색한다. 4부에서는 여성 관점이 철학적 의제를 다시 설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 변화를 초래함으로써 마주치게 되는 여성 혐오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칸트 미학을 차용하여 혐오의 반미학성을 드러내고, 혐오의 정치학을 넘어 포용의 인식론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