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이해는 전체주의 물결에 맞서는 활동이다 ”
이 모음집은 전체주의 운동이 유럽의 바다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다 파도로 급변하여 마침내 세계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가 차츰 퇴조하였던 1930~1954년까지 아렌트가 집필했던 미출간 원고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는 이 모음집에서 “전체주의의 물결”이라는 표현을 한번 언급하고 있는데, ‘물결’은 “사유의 바람”과 같이 은유다. 이 시기 역사적 사건, 즉 나치 및 볼셰비키 전체주의 운동과 국가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군국주의와 식민화된 조선의 해방, 그리고 남북한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고려하면, ‘물결’이란 은유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한참 생각하게 된다.
전체주의의 물결에 어떻게 맞설까? 아렌트는 이 난관에 대응하는 행위로서 정치적 이해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의 세계와 우리 시대의 세계는 전혀 다른가?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20세기 전반의 현실 세계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적 고찰은 현재의 우리를 이해하는 데 적실성이 있는가?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전체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가져왔으며, 항상 존재하는 잠재적인 위험으로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역사가 재현된다는 테제를 수용한다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아렌트는 전례 없는 사건인 새로운 시작이 이후 역사에서 언젠가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강조한다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작은 있고 끝은 없다. 아렌트의 두 주장은 역설적이다.
세계가 전체주의를 경험한지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았는데 전체주의의 유령은 21세기 세계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역사적 잔재가 다른 옷을 입은 채 슬며시 정치 영역에 침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나치즘의 부활은 간헐적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 정치 현실에서도 ‘전체주의’는 가끔 언급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인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다. 전체주의와 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렌트는 이 문제에 대면하기 위해 오래된 이야기, 즉 “우리는 용이 되지 않고는 용과 싸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비전체주의 국가에서 전체주의적 사유가 활개를 치는 것에 대응하여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사건에 직접 대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렌트는 전례 없는 사건을 전례에서 추론하는 인과론적 방식으로 전체주의적 사유와 정치의 부상을 막을 수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전체주의에 맞서는 행위로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의 엮은이 제롬 콘은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Essays in Understanding’이란 제목으로 총체성이 아닌 통일성을 드러낸다. 본 한국어판에서는 40편의 에세이를 5악장의 모음곡으로 비유하고 모음집 제목을 ‘전체주의의 물결’로 한다. 제롬 콘이 언급하듯이, “글의 내용은 그녀(아렌트)의 것이지만 책의 구조는 그녀가 구상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대담 자료를 제외하고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일차적 목적은 그녀의 생애 가운데 초기와 중기(24~48세) 사유의 궤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제목으로 아렌트의 의도를 해석하거나 책의 구성을 일정한 범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40편의 글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이에 앞서 아렌트와 가우스의 텔레비전 대담(「무엇이 남아있는가?: 언어가 남는다」)에 관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이 대담 자료는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며 본서의 구성과 기조를 이해하는 데 밑바탕이 될 것이다.
첫째, ‘현실을 대면하자’라는 현상학적 명제를 반영하듯, 전체주의 물결에 맞서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전체주의의 잔물결, 거센 파도, 여파餘波를 살펴본다. 여기에 실린 12편의 에세이와 7편의 서평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하던 시기 전후의 에세이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부각하지 않은 부분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특히, 나치 및 볼셰비키 전체주의에 관한 에세이가 외형적으로 이 모음집의 절반을 차지한다.
둘째, 아렌트는 정치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현대 철학의 흐름과 철학자의 입장을 소개했다. 이들 에세이 또한 현실 정치 및 전체주의 경험에 대한 아렌트의 실존주의적, 현상학적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셋째, 아렌트는 종교 개념을 정치 개념으로 전환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정치와 종교 영역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했다. 세속 종교 또는 정치신학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적 이해가 잘 드러나고 있다.
넷째, 아렌트는 자신의 저작에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인용하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뿐만 아니라 후기 저작, 특히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정치와 문학예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 6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째, 이 책의 후반부에는 미국주의와 유럽주의를 검토한다. 여기서는 1954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대외 이미지라는 주제로 행한 세 차례의 강의, 「꿈과 악몽」, 「유럽과 핵무기」, 「순응주의의 위협」을 배치하였다. 이 글들은 미국주의, 유럽주의 그리고 반미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독특한 입장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역사에 대한 기본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옮긴이는 한국어판 제목을 「전체주의의 물결과 정치적 이해」로 정했다. 엮은이의 의도를 고려하면서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1부 어두워지는 시대를 마주하며, 2부 정치평론에서 정치이론으로의 전환, 3부 「전체주의의 기원」 집필 시기, 4부 전체주의의 여파와 냉전의 서막의 범주 속에 각각의 에세이들을 묶고, 제목 선정과 책 구성, 그리고 가치에 대해 해제 에세이에서 상세히 소개했다. 옮긴이의 해제 에세이를 읽고, 이 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를 독자들께 권한다.
시대에 따라 양상은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파국적 상황은 언제든지 반복해 재현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20세기 전반 파국적 상황과 위험한 순간에 대한 정치적 이해의 결과이다. 아렌트의 독특한 정치적 이해는 비판과 실험 정신으로 촉진되었다. 현재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에게 정치적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활동인 사유하기 ㆍ 이해하기 ㆍ 판단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체주의 물결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인 명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에 새로운 것은 없지만,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달리 표현하면, 전체주의는 이제 역사적 유물이 되었지만, 그 변형된 모습은 역사 속에서 재현될 수 있다.